홍현영 / 수원시사편찬위원회 연구원

삼남대로에 위치한 수원

조선6대로 중 제5로 제주로(좌)와 제4로 통래로(우)

조선6대로 중 제5로 제주로(좌)와
제4로 통래로(우)

"본부는 3남 대로에 있기 때문에 매양 하나의 일이 있으면 8도에 전파되지 않는 것이 없다." 조선 후기 수원의 지식인이었던 우하영이 『관수만록』에서 설명한 수원의 지리적 위치다.
이렇듯 수원은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서울과 밀접한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또한 경기 이남의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관문 역할을 수행해 오고 있다. 이는 단순히 한양과 가깝기 때문이 아니라 국토 전체에 형성된 국가적 수준의 도로망과 경기도 내에 형성된 광역 교통로 덕분이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을 중심으로 한반도를 남북으로 연결한 노선이 모두 6개 있었는데(간선도로에 해당), 18세기 후반까지 큰 변동 없이 6대로(六大路) 체제를 유지해 오다 19세기 후반 10대로로 확대되었다. 10대로는 6대로에서 나뉜 것으로, 초기 6대로의 기본골격은 유지되었다.

6대로 중 수원을 지나는 길은 제5로 즉, 한양에서 전라남도 해남을 지나 제주도까지 가는 제주로(濟州路)였다. 제5로는 한강변 동작진에서 과천․수원→진위․평택→천안․공주․해남 등을 통해 제주도까지 연결된다. 주요 역은 수원에 있던 영화․장족․동화․청호 등을 비롯해 양성군(현 안성시)에 속했던 가천역으로 연결되었다. 제주로는 양재도가 관할했지만, 정조 때 수원 화성의 장안문 북쪽에 영화역을 설치하고 영화도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처럼 수원은 한양과의 접근성이 좋았고, 서쪽으로는 서해까지의 거리도 상당히 가까웠다. 동쪽으로는 조선시대의 제4로에 해당하는 동래로(東萊路)의 주요 길목인 용인이 가깝고, 남한강변에 자리한 여주 등의 평야지대와도 가까운 거리였다. 남쪽으로는 평택․천안 등지로 연결, 일찍부터 중부지방 교통의 결절점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화성 건설과 '사통팔달'

정조는 사도세자 묘를 옮길 때 뚝섬에서 한강을 건너 과천을 경유하여 지지대고개를 넘은 후 과천부터는 제주로를 따랐다. 그런데 정조의 13번 능행 중 과천을 거치는 것은 옮길 때와 그 이듬해 1790년 두 번뿐이다. 과천 대신 시흥과 안양을 거쳐 지지대로 가는 새로운 능행로를 마련한 것이다. 이는 시흥로의 여러 장점 때문으로 보이는데, 가장 큰 장점은 행차의 편리였다. 과천로에 비해 시흥로는 교량이 적고 고개도 낮아 원행에 어려움이 적었다. 이는 길을 닦는 백성들의 노동력도 줄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화성 건설도 도로망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요인은 지형적 여건, 주민 편의, 성문 배치, 성곽 내부의 하천과 수문, 성곽 건설에 필요한 건축자재의 운반 등이었다.
화성 건설 초기의 도로망은 중앙부에 자리한 화성행궁을 중심으로 골격이 갖추어졌다. 화성에서는 동서방향으로 관통하는 대로와 남북방향으로 관통하는 대로가 화성 중앙부에서 교차하는 十자형 도로망이 초기에 완성되었다. '십자로(十字街)'라 불리는 이 교차점이 현재의 종로사거리이다. 간선도로망에는 남문에서 십자로를 거쳐 북문으로 빠지는 도로와 십자로에서 직교하여 수원천을 횡단하여 동문으로 뻗어 용인․광주로 연결되는 도로가 포함되었다. 여기에 성의 북쪽에 또 하나의 네거리를 두어 서쪽으로는 화서문으로 연결되고 동북쪽으로는 북수문인 화홍문으로 연결되었다. 이와 같은 도로형태는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도 예를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도로망이 지형의 영향을 크게 받아 계획되었기 때문이다.

화성의 도로에서 십자로가 중심부가 되는 것은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는 중세도시적 발상과는 상반되는 내용이다. 여기에는 '사통팔달' 정신이 담겨 있는데, 도로가 동서남북으로 완벽하게 관통하진 않지만 교차하는 십자로를 둠으로써 그 정신을 실현하고 있는 셈이다. 사통팔달 정신은 성곽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문을 동서남북의 네 방향으로 건설한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른 지방의 읍성이 대개 동문․서문․남문의 세 방향으로 문을 둔 데에 비해, 화성에서는 네 방향의 문으로 사통팔달을 강조한 것이다.

근대 이후 수원의 교통체계 변화

수원의 지리적 위치는 일제시기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위치적 중요성은 전보다 더 증대되었다. 1905년에 개통된 경부선 철도는 서울과 남부지방 간의 연결 관계를 더욱 쉽게 했다. 경부선 철도는 수원 시가지가 자리하고 있던 화성을 관통하지 않고 팔달산 서쪽 사면에 형성된 평야지대를 종관했으며, 수원역도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에서 직선거리로 연결되었다. 또한 일제시기의 육상교통로는 화성을 관통하거나 주변 지역을 경유하도록 건설, 수원 지역의 접근성이 향상되었고 서울을 비롯한 인근 지역과의 상호작용이 더욱 활발해졌다.

서울에 있던 경기도청의 이전 신축공사(1967년 6월)에 따라, 수원은 경기도의 중심도시로 행정․경제․정치․교육․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후 1970년 경부고속도로, 1976년 경수산업도로 개통에 따라 서울과 수원을 중심으로 하는 산업 물동량의 흐름도 원활해졌다. 수도권전철 1호선이 1976년에 수원역까지 운행했고 2003년부터는 수원 남쪽의 화성시를 지나 충청남도 안산시까지 연장 운행함에 따라 수원의 교통여건은 매우 좋아졌다.

특히 수원은 경부선(1905년 개통), 수여선(1931년 개통), 수인선(1937년 개통) 등의 철도 개통에 힘입어 일제강점기부터 교통의 요지로 기능했다. 근대에 들어서는 경부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 수도권 전철, 경수산업도로, 경인산업도로, 용인-서울고속도로, 과천의왕간고속화도로 등의 교통로가 시 경계를 통과함에 따라 경기도에서 교통의 최대 요지로 기능하고 있다.

옛 수인선 철도

옛 수인선 철도

출처 : 수원문화원 - 수원을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