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옥 / 한국농업사학회 이사장

1789년 실학도시 수원 화성의 탄생

조는 수원부를 화성유수부(華城留守府)로 승격시켜서 나라의 근본을 도덕성과 농업생산에 두도록 했다. 왕권강화론과 중농사상(重農思想)을 수용하는 것는 물론 이용후생론과 과학기술 및 상공업의 중요성도 폭넓게 받아들이고 시행하고자 했다. 특히 수원은 정조가 농업생산의 진흥을 위한 권농정치의 강화를 의도하였던 곳이다.
만석거

만석거

서둔벌 농학의 성립

정조는 수원의 장안문 북쪽 들판에다 만석거(萬石渠)라는 수리시설을 축조하고 대유둔(大有屯)을 조성했으며, 만안제(萬安提 : 현 안양시), 만년제(萬年提 : 현 화성시 안녕리), 그리고 축만제(祝萬提 : 현 수원시 서둔동, 일명 西湖)를 축조했다. 저수지를 통해 동서남북의 들판을 수리(水利)가 가능한 옥토로 만들었던 것이다.

특히 서둔벌은 우리나라 굴지의 시범적인 농업도시 한가운데 위치해 백성들을 수탈하지 않고 유지되는 미래지향적 자급도시의 한 축으로 성립시킨 곳이었다. 그러나 정조의 급서로 수원부 권농과 시법농업의 꿈은 중단되었다. 1895년과 1899년에 이르러서야 실용 ‧ 근검 ‧ 노작을 지표로 하는 농업교육의 필요성이 고종의 칙서로 유고(諭告)되었다.

이후 일제의 통감부는 1906년 경기도 수원에 권업모범장을 개설하였다. 한국정부는 일제통감부로부터 권업모범장을 이양 받고 황제의 재가를 얻어 <권업모범장관제>를 공포하였다. 이렇게 서둔벌의 농업과학기술연구[권업모범장]와 농학교육[농림학교]은 수원의 서둔벌에 자리하게 되었다.

농사기술의 시험 ‧ 연구

1870년대 문호개방 이전에는 시험연구의 전담기관이 없어서 관(官), 민(民)이 필요에 따라 실시해 왔으나 정부가 실시할 때에는 적전(籍田)에서 실시하였다.
정조 때 수원 화성에서 새로운 수리시설로 가뭄을 극복하는 데서 근대적 농사기술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당시까지의 농사기술을 『농가지대전(農家之大典)』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엮어 지침서로 배포하려던 간곡하고도 거국적인 왕명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뒤 일제는 정조의 농업입국의지가 서린 수원의 북둔(대유둔)과 서둔(축만제둔) 중 수리조건이 좋고 풍광이 아름다운 서둔에 모범장의 위치를 선정했다. 1904년에 개통한 경부선 철도로 서둔의 교통이 편리한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권업모범장의 시험과 연구는 한국의 전통적 관행기술을 경시하고, 일본으로부터 직수입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한국에 맞는 농업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아니었다. 권업모범장은 '모범장'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실질적으로 한국농업에 일본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농업기술로도 한국을 지배하고자 했던 것이다.

농업과학의 교육

수원의 서둔벌에 세워진 농림학교는 1899년 대한제국의 <상공학교>로 개설되었다가 일제의 영향으로 1907년 3월 26일에 <농림학교>로 개편되어 수원 서둔벌에 옮겨진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고등농림학교에서 펼쳐진 서둔농학의 교육 실체는 애국운동과 독립항쟁이라는 청년학생들의 사명감과 애국심을 일깨웠다. 일제의 농업 교육이 오히려 식민지배로부터 민족을 구해야 한다는 의지를 키웠던 것이다.
청년학생들은 각종 동맹휴교・비밀결사・학생단체 조직활동이나 계몽활동을 벌였다. 동시에 학문연마와 체력단련에 주력하며 심신을 수양하고 민중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곧바로 항일운동에 동참케 하려는 뜻이었다.

서울대 농대와 농촌진흥청 그리고 '녹색혁명'

광복을 맞은 1945년 이후부터 1963년까지는 사회 제도를 정비하던 절대 빈곤기였다. 우장춘 박사의 귀국과 더불어 지속적인 연구ㆍ시험을 지탱해 왔던 채소 육종 분야와 최소한의 육종 및 자료 정리를 하던 작물 육종 분야를 제외하고는 참다운 농업과학기술의 시험 연구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1964년부터는 농촌과 농업 부흥을 위한 노력을 시작, 초기 연구의 단계를 거치게 되었다. 다수성 벼 품종으로 통일형 품종이 육성되어 일반형보다 30% 이상의 수량 증대를 이루었고, 식량인 주곡의 자급화 발판을 만들었다. 이는 수원의 농업과학연구와 교육이 이룩한 녹색혁명이었다. 국가적으로 강력하게 추진한 모든 농학연구는 쌀을 중심으로 하는 다수확 일변도의 내용들로 재론의 여지가 없었다. 식량자급이나 수입대체라는 과제는 절체절명의 국가적 요구였다고 할 수 있다.

수원농생명과학고등학교(당시 수원농림고등학교) 본관

수원농생명과학고등학교(당시 수원농림고등학교) 본관

농업과학의 메카, 서둔벌

서둔벌은 우리나라 근대 농학의 메카로 다시 태어난 곳이다. 그 당위성은 제각각 다르다. 정조와 같은 효심과 식량자급을 위한 시범도시이든, 또는 일제나 현대와 같은 식민지 식량연구기지로서의 모범성이나 학술성 파급을 위한 정책이든 탓할 것은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수원이 우리나라 식량문제의 해결을 위한 농학의 연구‧교육 중심지로서 농업진흥의 역사를 이끌어 왔다는 것이다. 이곳에 자리했던 서울대학교 농생명과학대학과 농촌진흥청은 이전으로 수원에서의 역할을 마감하게 된다. 하지만 농업과학의 메카로서의 역할이나 역사는 수원의 자부심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벼'통일'품종 육성 기념비

벼'통일'품종 육성 기념비

농총진흥청

농총진흥청

출처 : 수원문화원 - 수원을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