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표 / 수원박물관 학예팀, 전문위원

호랑이를 때려잡다니?

루백포호도

루백포호도

호랑이를 때려잡은 효자로 널리 알려진 최루백(崔婁伯)은 수원의 아전 최상저(崔尙翥)의 아들이다. 『오륜행실도』의 루백포호도(수원박물관 소장) 최상저는 수원을 본관으로 하는 수원최씨의 시조이다. 최루백은 고려 때부터 효자로 널리 알려져 『고려사』 열전 효우편과 조선시대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등에 일화가 전한다. 그의 효자비는 현재 화성 봉담읍 분천리 165-1번지에 있는데, 화성시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최루백이 15살 때, 사냥 나간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 최루백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며 도끼를 들고 나섰다. 발자국을 쫓아가 배불리 먹고 누워 있는 호랑이를 도끼로 내려치고 배를 갈랐다. 그 속에 있는 부친의 뼈와 살점을 골라 그릇에 넣어 홍법산 서쪽에 묻었다. 그리고 그 곁에 움막을 세워 3년간 묘를 지켰다. 어느 날 최루백이 졸고 있는데 아버지가 나타나 아들의 효심을 칭찬하는 시를 읊고 사라졌다. 최루백은 상을 마치고 호랑이 고기를 꺼내 먹었다.

후에 최루백은 과거에 급제해 1153년(의종 7) 사신으로 금나라에 용흥절(龍興節)을 축하하기 위해 다녀왔으며, 1154년(의종 12)에 치러진 승보시(升補試: 생원을 뽑는 시험)를 주관하는 등 여러 관직을 거쳐 기거사인(起居舍人) 국자사업(國子司業) 한림학사(翰林學士) 벼슬을 했다.

 

백호도

염경애 묘지석 뒷면 백호도 3D스캔자료. 백호를 염경애 묘지석에 그려 넣은 것은
최루백이 호랑이를 때려잡은 일화와 연관된 것으로 추측된다.

"간관(諫官)은 녹이나 지키는 자리가 아니오."

최루백의 묘지명에는 '사람됨이 너그럽고 공손하며 검소하다'고 적혀 있다. 아내 염경애의 묘지명에는 최루백의 검소와 강직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가난한 최루백이 지제고(知制誥:고려시대 관직으로 조서(詔書)·교서(敎書) 등을 작성하는 일을 함)에 임명되었을 때 이야기다.

아내가 "우리의 가난이 가시려나 봅니다"라고 기쁘게 말하니 최루백은 "간관은 녹봉이나 지키는 자리가 아니오"라고 했다. 아내가 다시 "어느 날 그대가 궁전의 섬돌에 서서 천자(天子)와 더불어 옳고 그른 것을 논쟁하게 된다면, 비록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무명치마를 입고 삼태기를 이고 살게 되더라도 또한 달게 여길 것입니다"라고 했다. 최루백의 검소하고 강직한 삶과 이를 지키도록 한 아내의 내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최루백은 직접 아내의 묘지명을 짓는다. 그때는 아내의 묘지명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최루백도 그랬다면 고려시대 여성 '염경애'는 이름 대신 '봉성현군 염씨', '최루백의 아내'로만 남았을 것이다.
묘지명에는 가난 속에서도 말없이 옆을 지켜준 아내에 대한 최루백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함께한 23년 동안 모시지도 못한 시아버지 제사를 지낸 효심과 내조의 고마움, 집안형편은 나아졌어도 아내가 있을 때만 못하다는 아쉬움과 그리움이 가득하다. 아내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담아 써내려 간 최루백의 마음이 잘 나타난다.

100살 할아버지 효자 최루백

최루백이 태어난 해의 정확한 자료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이를 추적할 수 있는 몇 가지 자료를 통해 나이를 추측해보면 최루백은 100세가 넘게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최루백의 묘지명은 '歲在 旃蒙赤○○…'으로 시작하는 데 최루백이 사망한 연대를 표시한 것이다.

염경애 묘지석

염경애 묘지석

여기서 '전몽(旃蒙)'은 '고갑자(古甲子)'에서 '을(乙)'을 뜻한다. 또한 '적○○(赤○○)'은 '적(赤)' 외에는 글자를 알아볼 수 없으나 '고갑자'를 살펴보면 '적'으로 시작하는 것은 '적분약(赤奮若)=축(丑)'밖에 없다. 이를 토대로 그가 죽은 해가 '을축년'이고 그의 생애로 미루어보아 1205년(희종 1년)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최루백은 몇 년에 태어났을까? 염경애의 묘지명에 단서가 있다. 아내가 자신의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전에 모시지 않았음에도 해마다 제사를 지낸 일에 대하여 감사한다고 쓰여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최루백이 15세 때 호환으로 죽어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으니 그 후에나 결혼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염경애는 47세인 1146년에 생을 마쳤으니 1100년에 태어나 1124년에 최루백과 결혼한 것이다. 최루백이 부친상 후 바로 결혼했다고 가정하면 19세일 것이고, 이를 통해 추적해보면 1106년 출생이 된다. 게다가 혼인을 더 늦게 했다면 최루백은 100살이 넘게 살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고려사』에는 수주(水州:고려시대 수원의 명칭)의 104세 할머니 기록이 있으니, 최루백이 100살 넘도록 살았다 해도 거짓으로만 볼 수는 없다. 물론 두 묘지석 자료만으로는 확실치가 않다. 하지만 수원사람 최루백이 호랑이를 때려잡은 효자인 데다 아내 염경애를 존경하고 사랑했으며 검소하고 강직한 삶을 살면서 100살이 넘도록 장수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문제되지는 않을 듯싶다.

화성 봉답읍 분천리에 위치한 최루백 효자비

화성 봉답읍 분천리에 위치한 최루백 효자비

출처 : 수원문화원 - 수원을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