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 / 수원박물관 학예연구사

수원의 숨겨진 보물, 진각국사 탑비

수원 화성의 뛰어난 건축물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건물, 방화수류정.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자 찾아오지만, 정작 그곳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는 곳에 수원의 불교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보물이 숨쉬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 바로 보물 제14호인 [창성사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彰聖寺 眞覺國師 大覺圓照塔碑)]가 그것이다. 보호각과 굳게 닫혀 있는 자물쇠 때문에 일반인들은 무심코 그 옆을 지나치지만, 수원이 소유한 9점(2012년 현재)의 보물 중 가장 오래되었고 유일한 고려시대의 유물이 바로 이 탑비라는 사실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까?

천희의 출생과 성장

'진각국사'라는 시호를 쓴 고려시대의 고승은 전부 셋이 있는데, 이 탑비의 주인공은 바로 천희(千熙)이다.

천희는 고려 후기 1307년(충렬왕 33) 5월 21일에 태어나 1382년(우왕 8) 6월 16일 창성사(彰聖寺)에서 운명한 것으로 탑비의 기록에 나와 있다. 창성사는 바로 수원의 진산인 광교산에 자리 잡았던 사찰로 현재는 터만 남아있지만 조선후기까지 그 명맥이 유지되어왔던 사찰이다. 천희의 호는 설산(雪山), 출신은 흥해(興海)로 포항지역 사람이었다.

1319년(충숙왕 6) 13살의 나이에 스님이 되고자 결심하여 화엄종 반룡사 일비(一非)스님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머리를 깎고 불교계에 들어섰다. 1325년(공민왕 12) 19살에 승과에 합격한 이후 금생사(金生寺), 덕천사(德泉寺), 부인사(符印寺), 개태사(開泰寺) 등 10군데 사찰에서 주지를 맡아 수행하였다. 아울러 오대산 및 금강산에서도 수행하였는데, 그러다 57세라는 늦은 나이에 중국 유학을 결심하여 1364년(공민왕 13)부터 2년간 원나라에서 선종의 중요한 핵심을 배우고 돌아왔다.

불교는 크게 불교 경전의 연구를 중시하는 교학(敎學)과 참선 및 수행을 중시하는 선학(禪學)으로 나뉜다. 천희는 화엄종 승려로 교학을 중시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중국에 가서 임제종(선종의 한 분야)의 맥을 잇는 만봉시울(萬峰時蔚)과 선(禪)을 나누고 왔다는 것은 당시 교학과 선학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불교계 분위기 속에서 화엄종단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자 한 천희의 의지로 보인다.
귀국 후 천희는 중앙 불교계에서 두각을 드러냈는데, 공민왕의 존숭과 사람들의 대환영 덕분에 한 국가의 스승이라는 국사(國師)로 책봉을 받았다. 일반 스님들과는 다르게 공민왕이 직접 천희를 찾아가 제의하였다고 하니 그에 대한 공민왕의 신망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창성사와 천희

창성사지 전경

창성사지 전경

국사가 된 이후 천희는 1370년(공민왕 19) 당시 왕사(王師)였던 나옹(懶翁, 1320~1376)과 함께 불교의 공부가 뛰어난 승려를 뽑는 증명법사(證明法師)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당대 권세를 갖고 있던 승려 신돈(辛旽, ?~1371)과도 깊은 친분이 있었다니 그의 활동범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신돈이 힘을 잃게 되자 천희는 영주 부석사(浮石寺)에 머무르면서 불교계를 이끌어 가고자 하였다.

천희는 1372년(공민왕 21) 부석사 주지로 있으며 1376년부터 1여 년 동안 무량수전과 조사전 등 전각을 손보면서 부석사를 크게 중창시켰다. 부석사는 절을 창건한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의 진영(眞影)이 모셔져 있는 화엄종계의 구심점 사찰이었던 만큼, 화엄종승이었던 천희는 이곳에서 화엄의 교세를 다시 한 번 크게 일으키고자 했을 것이다. 천희는 진각국사 이외에 부석국사(浮石國師)라고도 불리고 있는데, 이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천희는 치악산, 금강산, 오대산 등지에서 후학을 지도하다가 1382년(우왕 8) 6월 16일에 수원의 창성사에서 입적(入寂)하셨다. 국사의 나이 76세였다.

고려시대 창성사는 광교산에 수많은 부속 암자를 지닌 대사찰이었고, 조선 태종 6년에는 국가공인 사찰로서 지정될 만큼 수원을 대표하는 사찰이었다. 수원 무봉산의 만의사와 과천의 청계사와 더불어 창성사 역시 경기도 지방의 중요 사찰이었다. 국사의 입적 후 4년인 1386년(우왕 12)에 창성사에 천희의 탑비가 세워졌다. 우왕은 시호를 진각국사(眞覺國師)라 하고 탑의 명칭을 대각원조탑(大覺圓照塔)이라 내렸다. 그리고 당대 뛰어난 학자였던 이색(李穡, 1328~1396)에게 비문을 짓도록 명하였다.

조선시대 창성사에 관한 기록은 소략하여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1799년의 기록이 보임에 따라 조선후기까지 창성사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사이에 절은 폐사가 되었고 탑비 또한 방치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63년 보물 제14호로 지정되었고 탑비의 보호를 위해 1965년 6월 9일 현 위치인 매향동에 보호각을 짓고 옮겨와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현재 수원박물관에 복제품과 탁본 작품이 전시돼 있어 아쉬운 대로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

출처 : 수원문화원 - 수원을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