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혁 /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수원은 무예를 숭상하는 도시

수원은 예로부터 무예를 숭상하는 도시로 평가받아왔다. 그래서인지 조선 시대 문과 급제자보다 무과 급제자가 훨씬 많이 보인다. 즉 수원은 학문의 도시보다 무예의 도시로 인정받아온 것이다. 영조 연간에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도 "수원사람들은 무예를 좋아하고 인심은 질박하다. 글을 아는 사람이 적고 밭농사를 즐겨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조선 조정에서 간행한 지리지에 나오는 이 기록은 수원지역 사람들의 무예 숭상과 풍속을 잘 보여준다.

조선 후기 실학자로 평가받는 유형원은 병자호란의 참혹상을 직접 겪었고, 이후 조선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조선을 발전시킬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바로 『반계수록(磻溪隧錄)』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인데, 여기서 유형원은 '수원 사람들은 농사에 열심이며 활쏘기에 힘쓴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수원은 다른 어떤 도시보다 무예에 열심이었던 것이다.

수원은 왜 무예를 숭상하는 도시가 되었을까?

득중정어사도

득중정어사도

그 이유는 지리적으로 한반도 중심부의 서쪽 해안 일대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지리서에 나오는 수원의 행정구역은 오늘날 수원시와 화성시, 오산시 그리고 평택시의 안중면까지 포함된 지역이었다. 이렇게 넓게 자리 잡은 수원은 오늘날 화성시의 대부도와 제부도를 비롯한 섬들이 있는 해안지역을 방어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수원은 왜구를 막는 방어영이 있는 도시였고, 실제 왜구의 침략을 막는 군사도시로 성장한 곳이다.

조선시대는 일본에서 왜구들이 대마도에 진을 치고 한반도를 공격할 때 제일 먼저 상륙하는 곳이 바로 부산이었다. 부산을 거쳐 통영으로 통영에서 여수로 여수에서 목포 일대로 남해안을 타고 노략질을 하다가 서해안으로 이동하여 충청도 일대로 올라온다. 이때 충청도 일대에서 왜구를 방어하는 곳이 바로 오늘날 충청남도 보령시이다. 보령의 오천항은 충청수영이 있는 곳으로 왜구를 막는 군사도시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이곳이 왜구에게 패하면 마지막으로 왜구와 방어하는 곳이 바로 수원이었다. 그만큼 수원지역의 역할은 중요했다. 수원에서 패배하면 왜구들이 걷잡을 수 없이 한양으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수원은 정예의 군사들이 주둔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해안에도 있지만 주로 독산성에 주둔하면서 수원지역 전체를 보호했다.

사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수원사람들 이야기를 보면 무예 숭상의 기질이 조선시대 이전부터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 원종 당시 수원 해안가인 착량에 주둔하던 몽고군이 대부도에 들어가 섬사람들을 괴롭히고 노략질을 하자 수원 백성들이 대부도로 들어가 몽고군을 죽이며 대항했다. 몽고군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고려의 관군들도 대항하지 못 했는데 백성들이 몽고군에 대항했으니 수원사람들의 숭무사상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수원의 명문 무인 가문

숭무 전통은 수원지역의 특출한 무반 집안에서도 확인된다. 화성 축성 당시 감독관으로 최선을 다한 김혁 장군의 집안인 해풍 김씨와 화성유수를 역임한 조심태 장군의 들목 조씨라고 불리는 평양 조씨 가문이다.

해풍 김씨 남양쌍부파는 수원지역에서 400년간 살아오면서 김대건․김시건․김체건 장군과 김혁 장군을 배출했다. 조심태 장군의 평양 조씨 가문 역시 조선 후기 무반벌열로 이름난 집안으로 수원의 어목천 일대에서 거주했다.
이처럼 조선시대 양대 무반 가문이 수원에 자리 잡으면서 무예를 더더욱 숭상하게 되었다. 하지만 수원이 더 결정적으로 무예의 도시로 성장한 것은 바로 정조 연간에 장용영외영이 수원에 주둔하고 나서다.

득중정어사도 중 활쏘기

득중정어사도 중 활쏘기

정조의 수원 무예인 육성

정조는 수원으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옮기면서 1년에 한차례 수원을 방문했다. 그 기념으로 수원에 특별 과거시험을 치렀는데 문과 급제자보다 무과 급제자를 몇 배 이상 뽑아 수원지역의 군사력에 도움을 주었다. 특히 어머니 회갑잔치인 진찬연이 있던 1795년에는 문과 합격자가 5명인데 반해 무과 합격자는 56명을 선발, 무과에 전념하는 지역 청년들의 사기를 올려주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조의 친위군영인 장용영외영의 군사들이 주둔하여 수시로 백성들과 함께 군사훈련을 하며 무예 숭상의 풍토는 더 커져갔다. 특히 활쏘기의 달인인 정조가 수원에 행차하여 군사들과 활쏘기를 하면서 활쏘기의 전통이 수원지역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수원의 무예 숭상 정신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으로 이어진다. 독립운동은 목숨을 걸고 투쟁해야 한다. 그런 3․1만세운동이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날 때 수원에서 가장 강력한 전개된 것은 예부터 이어진 숭무정신이 수원지역 사람들에게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전통으로 1944년 식민지 주구들을 없애고자 부민관에 폭탄을 던진 조문기 선생도 나오게 된 것이다. 수원의 숭무정신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남양 방어영의 후신으로 해병대 사령부와 공군10전투비행단과 육군50사단을 존재케 한다. 나아가 스포츠로 연결되어 수원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뛰어난 스포츠 도시로 자리매김하는 바탕이 되었다.

여지도서

여지도서

수원부지도

수원부지도

조심태

조심태

출처 : 수원문화원 - 수원을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