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현희 / 수원시사편찬위원회 선임연구원
'수원깍쟁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나왔을까? 수원 사람을 왜 깍쟁이라고 부르게 되었을까? 수원 사람이라면 누구나 궁금할 듯하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깍쟁이는 인색하고 얄미운 행동을 일삼는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얄미운 친구를 부를 때 깍쟁이라고 부른다. 원래 깍쟁이라는 말은 가가쟁이, 즉 상인이라는 뜻이 변형되어 온 것이라고도 하고, 서울 청계천 일대에 기거하며 구걸을 하던 무뢰배들을 일컫는다고도 한다. 최초의 깍쟁이 별칭을 받은 것은 고려시대 개성깍쟁이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수원사람들을 언제부터인가 깍쟁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수원깍쟁이라는 말 이외에도 수원청지기라는 말이 있다. 1924년 『개벽』이라는 잡지에는 항간에서 각 도인을 평하는 것을 싣고 있다. 황해도는 광주리장사, 평안도 기생, 강원도 행랑살이, 함경도 물장사, 충청도는 양반, 경상도 학자, 전라도 광대로 칭하고 있다. 경기도에 대해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과천 나무장사, 오강 뱃사공, 광주 산나물 장사, 수원의 청직이, 양주는 말군, 고양은 통지게 장사, 여주․이천 쌀장사라는 것이다. 청지기는 남의 것을 대신 맡아 지키고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뜻과 양반집 수청방에서 여러 가지 잡일을 맡아보고 시중을 드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청지기의 자취도 없이 깍쟁이란 말만 수원사람의 상징적 표현처럼 남아 있다.

발가벗고 삼십 리를 뛴다는 수원깍쟁이들

수원깍쟁이는 지독하고 인색하다는 뜻을 풍긴다. 이를 뒷받침하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문풍지를 또 하나는 짚신을 소재로 한 이야기다.
수원깍쟁이의 상대역으로는 항상 개성상인이 등장한다. 전통적으로 명성이 높았던 개성상인에 비견될 정도라니? 수원상인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말도 되겠다.

첫 번째 이야기는 어느 겨울밤 낡은 가옥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보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창호가 다 뜯겨 나가 겨울밤을 지새우려면 풀과 문풍지를 사서 붙여 바람을 막아야 했다. 개성상인은 풀을, 수원상인은 문풍지를 사서 바람을 막았다. 개성상인은 풀이 더 싸다고 생각해 돈이 적게 들어간 것을 기뻐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수원상인이 문풍지를 뜯어 가더라는 것이다. 수원상인이 한 수 위였던 것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짚신이 닳을까 봐 노심초사하는 내용이다. 두 상인이 함께 걸어가다가 벌어진 짚신에 관련한 것이다. 짚신이 닳을까 봐 허리에 차고 걸어가던 두 상인의 맞은편으로 사람이 오자, 개성상인은 짚신을 신고 몇 걸음 걷다가 벗어 들었다. 그런데 수원상인은 신을 신은 채 닳을까봐 아예 움직이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다 지나가자 그제서야 신을 벗었다니 이 역시 수원상인의 정신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수원깍쟁이 이야기는 시대가 변하면서 시점도 소재도 조끔씩 바뀌었다. 때론 조선시대의 이야기로, 때로는 한국전쟁 당시의 이야기로 시점으로 회자되기도 한다. 전설이나 구전(口傳)은 사람들의 입을 거치면서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 다양한 변형은 사람들에게 그만큼 의미와 관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수원사람 수원깍쟁이, 그리고 수원이야기

그렇다면 수원사람들은 깍쟁이라는 별칭 아닌 별칭을 어떻게 갖게 된 것일까. 전해오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깍쟁이 이미지가 그대로 굳어버린 것일까. 사실 깍쟁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는 여러 곳이다. 조선시대 큰 상업도시는 대부분이 깍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수원깍쟁이의 상대역을 맡아준 개성깍쟁이 외에도 서울깍쟁이, 안성깍쟁이 등이 있다. 이 지역들의 공통점은 큰 장이 서는 곳이자 대도시라는 점이다.

개성깍쟁이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상업판도를 뒤흔든 개성상인을 이르는 말이다.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경강상인과 함께 양분하지만, 여전히 최대 상업 집단으로 위용을 자랑한다. 그런데 언제부터 수원상인들이 깍쟁이란 이름으로 개성상인의 명성을 위협하게 되었다.

조선최대 신도시 건설사업인 화성 축성 후, 정조는 자급자족이 수원을 가능한 도시로 육성하기 위해 각종 부양책을 내놓는다. 이로써 수원은 경기도 개성, 안성과 더불어 3대 상권을 형성했다. 이곳을 중심으로 넓은 시장이 만들어지고 경기 남부 지역의 물산이 몰리니 상인들도 수원으로 모여들었다. 또한 주변 상권의 중심축을 이루게 된 것도 상인의 집단의 성장을 가져왔다. 서울깍쟁이가 수원깍쟁이한테 뺨맞고 간다고 하는 말이 나왔듯, 개성상인 상인을 능가할 만큼 수원상인이 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수원깍쟁이는 수원사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깍쟁이라는 표현은 상인들만 아니라 수원사람들의 특징을 이르기도 한다. 수원사람은 신도시 건설 이후 도시적 경험을 거치면서 도시사람이 되어 갔다. 이런 점이 뭉근한 농촌적 인심과 비교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해타산에 밝고 실리에 밝은 사람들의 삶과 정서 속에서 수원사람들은 어느덧 깍쟁이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깍쟁이가 합리적인 상인이나 소비자일 수도 있으니 그다지 걱정할 이미지만은 아닐 듯싶다.

출처 : 수원문화원 - 수원을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