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상균 / 경기문화연구원장
화성 축조 전의 수원시장은 미미했을 거라고 추정된다. 시장은 서울을 중심으로 방사선 형태로 발전하는데 그 기준은 교통로였다. 한강 수로를 따라가며 송파장이며 여주읍장 등이 발전하고, 봉화로를 따라가며 낙생장과 용인장, 백암장, 안성장 등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가 부친인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고 신도시를 건설하면서 현륭원으로 가는 원행로를 개설, 삼남으로 가는 새 대로가 생겼다. 이를 계기로 수원의 시장도 활성화된다.

수원상인에 준 특혜

정조 21년(1797) 비변사등록 기사에는 '화성부내신접부실호삼모구획절목(華城府內新接富實戶蔘帽區劃節目)이 나온다. 화성(수원)시전의 안정된 발전을 위해서 부자 20명으로 계를 조직하고 화성으로 이주시켜 집을 짓고 장사를 하며 살아가게 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14조의 절목을 제시한 것이다. 관모와 인삼을 독점 판매하도록 수원 상인에게 특혜를 베푼 절목이기도 하다. 또 이들에게 화성 안의 큰길 남북으로 기와집을 짓도록 하였는데 목재 구입과 관련된 편의를 제공하고 필요한 사람 '차인(差人)'도 붙여 주었다. 그리고 재정 지원도 아끼지 않아 이들이 빠른 시기에 정착하도록 했다.

1790년 <수원부읍지>에는 당시 수원부사 조심태의 건의에 따라 '장사를 좀 아는 수원사람'에게 1만 5천 냥을 대여하여 시전을 개설토록 한 내용이 나온다. 그래서 입색전과 어물전, 목포전, 미곡전 등이 관문 밖 대로 주변에 개설되어 인물이 폭주하고 시전이 번성하여 완전히 '대도회'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바야흐로 수원 상인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시전에서 거래가 가장 활발했던 상품은 단연 소금과 쌀이었다. 서쪽으로 해안이 가깝기 때문에 소금과 생선이 수원으로 많이 들어왔고, 화성 자체와 남쪽 및 동쪽으로 논이 발달했으므로 쌀의 거래도 활발하였다. 더욱이 1795년에 축조한 만석거와 그 아래 대유둔 평야는 논농사의 발전으로 나타났고, 이후 축만제(서호)와 서둔의 경영으로 '수원쌀'은 더 풍부해졌다. 게다가 화성의 축조로 인해 유입된 외부 노동자의 증가도 무시할 수 없는 상업 발전 요인이었다.

화성 축조 당시 부리던 정부 소유의 소에다 더 구입한 소들을 농민들에게 나누어준 것도 발전 요인이 됐다. 농가 2가구에 소 한 마리씩을 나눠주되 3년 안에 송아지 한 마리로 갚는 조건이었다. 소의 힘센 노동력을 이용한 농사에서 늘어난 소출은 장시가 살아나고 백성들도 부유해지는 구조를 만들었다. 새로 생긴 삼남대로에다 소의 거래까지 활성화되니 시장의 거래 규모도 더 커졌다. 한마디로 수원장시의 '판'이 커진 것이다.

1929년 수원시장

1929년 수원시장

도매도 겸한 수원시장 상인들

화성 축조 당시 화성을 효과적으로 지키기 위해 인근 지역으로부터 증원군을 받는 제도를 만들었다. 동쪽성은 용인, 남쪽성은 진위요, 서쪽은 안산이며 북쪽은 과천 등이다. 이 협조 체제는 수원의 장시에도 영향을 미쳤다. 즉 수원은 주변의 위성도시를 거느린 것 같은 상업의 특성을 보여준다.

그 효과는 서울보다는 못하지만 도매시장의 기능을 갖추는 것으로 나타난다. 더구나 아직 개인 자동차가 보급되기 전이었으므로 용인, 오산, 안산 평택 등 상인들에게는 서울보다 가까운 수원시장이 각광을 받았다. 여기에는 배달을 해주거나 전화 주문 만으로 물건을 보내주는 등 수원상인 특유의 근면과 신용이 뒷받침되어 효과를 더욱 끌어올렸다. 수원상인들의 장사 규모가 커진 것도 한몫했다.

광덕상회는 수원상인 정신의 표본

1930년대 영동시장에서 비단을 취급하던 광덕상회(창업자 고 조재훈)는 수원상인의 표본이다. 정당한 부를 쌓아 넓게 덕을 베풀겠다는 신념으로 '광덕'을 붙였다. 일제강점기라 비단거래가 줄자 광덕상회는 무명, 광목, 옥양목과 문풍지도 취급했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폭격을 맞지만, 수복 후엔 불탄 자리에 다시 건물을 짓고 장사를 시작했다. 양반체통을 어긴다고 부친께 매를 맞으며 시작했던 장사를 그만둘 수 없었던 것이다. 신용 잘 지키는 성실한 장사로 부를 쌓게 되자 종중에다 수십억의 돈을 내놓아 형편 어려운 집 아이들의 교육비나 가문 일으키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장사를 하는 사람은 양반이 못된다고 생각하지 마라. 양반이라도 장사를 할 수 있고 농사도 지을 수 있다. 장사를 하든 뭐를 하든 양반은 양반의 정신을 지니고 있으면 그게 양반이다. 장사도 상인정신을 바로 세워서 하면 된다."고 자녀에게 한 말처럼 조재훈은 생활 속에서도 상도의 예를 지켰다. 심지어 세금을 낼 때도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입고 돈도 새 돈으로 바꿔서 냈다. 세금을 내는 것 또한 상도라 여겼던 상인 정신 덕분에 경기도에서는 최초로 국세청에서 주는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양반답게 상도를 지킨다는 것!' 수원상인의 표상이라 하겠다.

수원상인의 특성을 보면, 부지런하고 신용을 지키는 것은 기본이고 인내심과 상업의지가 강하다. 계산에 밝되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따지고 잰다. 그러면서 남의 신세를 지지 않으려고 하는 야무진 사람이다. 그래서 '깍쟁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상업을 다소 업신여긴 듯한 가가(假家)쟁이, 혹은 고가(賈家)쟁이가 변하여 깍쟁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경제적 이해타산에 밝고 사업수단이 뛰어 난 기질이 바로 깍쟁이 기질 아닌가? 미래에 꼭 필요한 기질일 터인데 그 출발점은 수원상인이었다.

 

1929년 팔달문 성외시장

1929년 팔달문 성외시장

1929년 시일의 음식점(장날 음식점)

1929년 시일의 음식점(장날 음식점)

출처 : 수원문화원 - 수원을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