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혁 /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화성전도

화성전도

취석실 우하영은 어디서 태어났나?

우성전 묘역

우성전 묘역

실학은 조선후기 문명을 한 단계 성장시켰으며 백성들의 민권의식과 사회전반의 경제를 향상시켰다. 물론 중농주의와 중상주의를 연구하고 이의 현실화를 꿈꾼 학자들은 자신들만의 학파를 고집하지 않고 두 가지 실학적 학풍을 두루 조화시키려 했다. 하지만 나름의 당파와 공부한 내용이 달랐기 때문에 이를 실현한 인물은 그리 흔치 않다.

그럼에도 취석실(醉石室) 우하영(禹夏永)은 중농주의의 경세치용 사상과 중상주의의 이용후생 정신을 하나로 모은 실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조선의 백성 모두가 부유해지고 외세로부터 자주적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우하영은 1741년(영조 17) 음력 2월 1일 경기도 수원도호부 호매절 어량천면(현 화성시 매송면 어천리) 외촌의 몰락한 남인계의 양반가문 가난한 선비 우정서(禹鼎瑞)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임진왜란의 이름난 의병장인 우성전이 그의 7대조이니 명문에 든다. 그의 자는 대유(大猷), 호는 취석실(醉石室)이다. 스스로 호를 그렇게 지은 것은 취해서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 하는 어리석은 돌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머니 꿈에 공자가 나타나다

우하영은 <취석실주인옹자서(醉石室主人翁自敍)>라는 자서전으로 자신의 생애를 짤막하게 남겼다. 비록 소략한 내용이지만 그의 생애 큰 흐름을 볼 수 있는 자료다. 이 자서전에 의하면 그가 6세 때 어머니의 꿈에 공자가 찾아와 어릴 때부터 집안의 큰 촉망을 받았다고 한다. 7세 때부터 조부 우택상에게 4서3경 등 유학경전을 배우며 이를 잘 익혀 기대를 모았고, 『사략』을 정독했다. 첫날에는 1행, 둘째 날에는 3행, 셋째 날에는 12행을 무난히 읽을 만큼 독경실력이 일취월장하여 총명함을 보였다. 그러나 신중히 정독하기 위해 8,9행을 읽은 습관을 들였다고 한다.

이 무렵 조부에게서 시를 지어보라는 명을 받고 '인성수대 불여풍성원(人聲雖大 不如風聲遠)'이라고 지어 집안과 인근의 유림 원로들에게서 큰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1571년(영조 27) 9월 13일 조부의 상을 당하고 이어 불의의 화재로 집과 조상 전래의 많은 서적이 불타버리는 등 불행을 겪고 수년 동안 계속해온 공부를 중단했다.

어량천 외촌에서 살아온 우하영 집안은 자손이 귀해 세 집에 아들 하나만 있을 정도라 고독한 환경 속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서인의 집권으로 남인이 몰락한 데다 경제적으로도 매우 궁핍했다. 그는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큰 포부를 갖고 15세 때부터 학업에 전념하여 공령문(功令文)을 짓기도 했다. 그러나 그 해 가을 사마시에 낙방한 것을 비롯하여 전후 12번이나 응시한 과거에 모두 합격하지 못했다. 당시 과거제도의 부패와 운영상의 문란 탓이 컸다.

이후 우하영은 과거를 단념하고 새로운 학풍으로 대두된 실학 연구에 전념했다. 이러한 노력 덕에 우하영은 성호 이익으로 대표되는 경기 남부지역 일대의 경세치용계열 실학자들 가운데 상공업 및 광업과 토지제도 개혁 및 신분제 인식에 있어 매우 특이하고 선진적인 존재가 되었다.

조선을 발전시키기 위해 이렇게 하셔야 합니다!

우하영(1741-1812)의 천일록(1804년)-서울대학교 규장각

우하영(1741-1812)의 천일록(1804년)
서울대학교 규장각

우하영은 광산 개발과 관련하여 대부분의 실학자들이 광산국영화를 주장한 데 비해 관청의 간섭을 배제하여 광산을 민간 자본으로 개발하고 여기에 참여하는 광산노동자들에 대한 신분적 안정과 대우를 해줄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러한 파격적인 제안은 양반 및 지주들에게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이 광산노동자로 새로운 삶을 찾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우하영이 상업 발전에 대한 진보적 시각을 지녔지만 그가 근본적으로 연구한 것은 바로 농업의 발전이었다. 그는 『농사직설』ㆍ『농가집성』등 전시대의 선행농서를 면밀히 검토하고, 자신의 영농체험을 바탕으로 소농 중심의 집약적 농법과 올바른 농업정신을 강조했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집안의 몰락으로 그는 어천에서 13두락을 스스로 농사지으면서 새로운 수차를 대대적으로 이용하고 저수지를 확대하는 농법개발을 체계화했다. 이러한 경험은 정조에게 올린 새로운 조선을 만드는 전초기지인 화성(華城)을 발전시키기 위한 농업 및 상업 발전과 군사개혁에 대한 상소문에서도 자세히 나타났고, 정조 역시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우하영에 대하여 상당한 애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우하영의 또 다른 개혁은 바로 신분제였다. 그는 일차적으로 노비제도 자체를 부정했고, 노비 역시 인간인 이상 평민으로서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양반의 신분으로 노비를 없애자고 했으니 파격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홀로 사는 과부에 대한 슬픔을 이해했다.

조선시대 과부재가금지법으로 인하여 이른 나이에 홀로 지내는 과부들의 재혼을 금지하고 있었지만 우하영은 과부들의 재가를 허용하여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살기를 원했다.
비록 그의 실천적 삶의 자세와 학문 사상이 당대 현실화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그의 실학정신은 경기도 실학의 근간이 되었다. 더불어 새로운 개혁을 요구하는 백성들의 이념으로 성장하여 훗날 그 어느 지역보다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터전이 되었다.

출처 : 수원문화원 - 수원을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