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근 / 수원박물관 학예연구사

'여민동락'한 기생들

봉수당진찬도 부분(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봉수당진찬도 부분(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수원의 가을 모습은 세계문화유산 화성이 팔달산과 광교산의 오색찬란함과 함께 빛나며 옷을 갈아입는 것이다. 더불어 '화성문화제'와 함께 모든 시민들이 즐거움을 나누는 축제의 장이 된다. 이때 2백년 전의 성대한 잔치가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다시금 펼쳐진다. 백성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고자 했던 정조대왕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진찬연을 벌였다. 그 잔치가 다시 수원시민들과 함께 '여민동락(與民同樂)'하는 것이다.

2백년전의 진찬연에서는 화성유수부의 기생 계섬이 60세의 나이로 잔치를 시작하는 노랫가락을 부르며, 30여명의 기생들이 저마다의 기예를 맘껏 발휘하며 잔치의 꽃을 피웠다. 봉수당에서 열린 진찬연을 아름답게 빛냈던 것은 기생들의 가무와 고운 자태였다. 수원에서는 옛날부터 기생들의 풍류와 예악이 울려 퍼지던 곳이었다. 화성 축성을 총감독했던 영의정 번암 채제공 선생도 화성의 제일가는 풍경, 방화수류정에 올라 연못 용연(龍淵)의 배 위에서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기생을 찬사하였다. 전통 사회의 풍류와 예악에서는 기생이 꽃과 같이 아름다워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전통적으로 기생은 '해어화(解語花)'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으로 본래 미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전통시대의 기생들은 신분적으로는 보잘것없는 천민이었지만 관공서에 소속되어 빼어난 미모뿐만 아니라 춤과 노래의 예술적 재능과 시(詩)․서(書)․화(畵)에 능했던 사람들이었다. 또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아름다움과 지성을 겸비한 황진이, 의기가 충만했던 논개 등은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기생들이었다.

화성문화제 봉수당 진찬연 재현행사

화성문화제 봉수당 진찬연 재현행사

화성행궁을 울린 '대한독립만세'

『매일신보』「수원기생의 성복참례」, 1919년 1월 29일

『매일신보』「수원기생의 성복참례」
1919년 1월 29일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7)-독립운동에관한건」제34보, 1919년 4월 1일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7)-독립운동에
관한건」제34보, 1919년 4월 1일

봉수당에서 '어화 둥둥' 가락 소리에 오색을 휘날리는 몸짓의 기생들이 생각 날 때면, 기생들의 춤과 노래 소리와 함께 '대한독립만세'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오버랩 되는 것은 왜일까? 기생하면 천한 여성의 이미지로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다른 사람을 위해 웃음을 흘리는 여성이 그려진다. 그러나 이 기생들이 일제강점기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사실을 아는가?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의 절정이었던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고종임금이 돌아가신 것을 누구보다도 슬퍼하며 곡을 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친 수원기생 30여명이 있다.

전통적인 기생들의 삶이 변화한 것은 조선사회가 붕괴되면서 부터였다. 1907년 관기제도가 폐지되면서, 1908년 일제는 '기생 및 창기 단속령'을 반포하여 기생들을 상업적으로 전락시켰다. 이때부터 기생들은 식민지배의 혹독한 통제아래 감독과 관리를 받게 되었다.

수원기생조합은 191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수원예기조합'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수원기생들은 수원면 남수리에 살았는데 지금의 화홍문 아래 수원천을 따라 있는 남향동 일대이다.

수원 기생들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조국의 독립을 되찾고자 일제의 총칼을 두려워하지 않고 만세운동에 앞장섰다. 수원 기생들은 1919년 3월 29일 당시 화성행궁 봉수당을 사용했던 자혜의원으로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다가 그 앞에서 당당하게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자혜의원 앞에는 수원경찰서가 있어 일본 경찰과 수비대가 총칼을 차고 근무하고 있었으나, 수원기생들은 일제의 총칼에 굴하지 않고 만세를 부르는 기개를 보여주었다.

조선의 백성, 기생 김향화

수원기생 김향화(『조선미인보감』, 1918년 7월)

수원기생 김향화
(『조선미인보감』, 1918년 7월)

『매일신보』「소요기생공판」, 1919년 6월 20일

『매일신보』「소요기생공판」,
1919년 6월 20일

수원기생들의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은 의로운 기생 김향화(金香花)이다. 김향화는 1896년 7월 16일 생으로 본명은 순이(順伊)였다. 향화는 기명으로 꽃과 같이 아름다운 그녀의 명성에 걸 맞는 이름이었다. 원래 서울에서 태어나고 어느 때부터인지 수원에 내려와 기생으로 이름을 떨쳤다.

김향화는 경성에서 나고 자라서 수원기생이 된 후 '수원예기조합'의 꽃이 되었다. 갸름한 얼굴에 주근깨가 있으나, 목청은 탁 트여서 애절하면서도 구슬프게 노래를 잘하며 순하고 귀여운 기생이었다. 김향화는 검무와 승무에 능했고, 경성잡가와 서관소리를 잘 불렀다. 또한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들어왔던 악기인 양금도 잘 다루었다. 지금은 빛바랜 『조선미인보감』이라는 책에 남아있는 김향화의 사진을 가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왠지 모를 굳셈과 당당함이 느껴진다.

당시 꽃다운 나이 스물셋의 기생 김향화는 기생들의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수원기생 30여명을 이끌다가 일제 경찰에 바로 붙잡혔다. 이후 2개월여의 감금과 고문 끝에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 검사분국으로 넘겨져 재판을 받고 징역 6개월에 처해져 옥고를 치렀다. 재판 과정에는 많은 사람들이 방청객으로 참석하여 김향화의 의로움을 지켜보았다. 김향화는 기생으로서가 아닌 조선의 백성으로 재판정에 당당히 서서 대한독립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김향화의 의로움은 세상에 알려져 지난 2009년 4월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김향화와 수원기생들의 3․1운동은 관기의 후예와 전통예능의 전수자로서 보여준 민족적 항쟁이었으며, 일제의 강압적인 기생제도와 식민통제에 대한 생존의 몸부림이었다. 당시 식민지 권력에 대항하며 보여주었던 수원기생들의 민족적 의로움은 오늘의 교훈으로 이어지고 있다.

출처 : 수원문화원 - 수원을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