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근 / 수원박물관 학예연구사

'만세! 만세! 대한독립만세!'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만세의 물결이 전국적으로 휘몰아치며, 나라를 빼앗겼던 우리 백성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한 목숨을 건 항쟁을 시작했다. 지금도 매년 3월 1일이면 대한독립만세의 물결이 그날을 잊지 않기 위해 물결친다. 우리는 3․1운동의 대한독립만세를 생각하면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유관순 누나'를 바로 머리에 떠올린다.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다 붙잡혀 일제의 고문에 의해 순국한 우리의 영원한 누나를 생각하고 그리워한다.

그러나 우리 고장 수원에도 18살이라는 나이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비밀 독립활동 중 일제 경찰에 붙잡혀 갖은 옥고를 치르다 19살의 나이에 순국한 누나가 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수원의 유관순, 이선경(李善卿) 누나'이다.

수원의 3․1운동은 3월 1일 서울, 개성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최초의 만세함성이 터진 곳은 화홍문 옆 방화수류정(용두각) 아래였다. 수원면의 만세운동은 교사와 학생들의 주도적인 역할이 중심을 이루었고, 일제의 농장에서 착취당하고 있던 소작농들과 상권을 침탈당하여 생존권에 위협을 받던 상인들이 가세하였다. 또한 일부의 노동자들과 사회적 천민으로 대우받던 기생들까지도 적극적인 만세운동을 벌였다.

조국독립을 꿈꾼 소녀, '구국민단'에서 활동하다

「구국민단 사건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21. 4. 12

「구국민단 사건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21. 4. 12

수원의 3월 1일 화홍문 방화수류정(용두각) 아래에서 수백 명이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였을 때, 이들을 이끌었던 교사와 젊은 학생들이 있었다. 이날의 만세운동은 기독교측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이자 삼일여학교(현 매향중학교) 교사였던 김세환의 지시 아래 수원상업강습소 교사 김노적, 박선태(당시 20세), 임순남(당시 18세), 최문순(당시 18세), 이종상(당시 19세), 김석호, 김병갑, 이희경, 신용준, 이선경(당시 18세) 등의 학생들이 중심이 되었다. 수원지역의 3․1운동은 이렇듯 민족적 의기가 충만했던 지식인층이었던 교사와 청년학생들이 이끌어 나갔다.

이들은 3․1운동의 주도적 역할 이후 조국독립을 위한 민족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종상, 임순남, 최문순, 이선경, 박선태 등은 일본의 굴레를 벗어나 조선의 독립을 목표로 1919년 3월 말경부터 상해임시정부 임원 차관호와 연락하여 경성에 거주하고 있던 박성환(일명 김일)에게서 보내오는 『독립신문』을 삼일여학교 여교사 차인재와 함께 같은 해 8~9월 계속 수원면 내의 각 조선인 집에 배포하였다. 이와 함께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창가집』․『대한민보』 등도 만들어 배포했다.

본격적으로 조국독립을 위한 행동은 비밀결사 단체를 조직하는데 있었다. 이들은 1920년 6월 7일 수원면 서호(西湖) 부근에서 만나 '혈복단(血復團)'을 '구국민단(救國民團)'으로 개칭하는 논의를 하고, 1920년 6월 20일 '구국민단'을 조직하였다.

박선태가 회장, 이득수(당시 19세)는 부회장이 되고, 서무부장 임순남, 재무부장 최문순, 교제부장 차인재, 이선경은 구제부장을 맡았다. 그리고 수원에 거주하고 있던 김석호, 김노적, 윤귀섭, 김병갑, 이희경, 신용준 등이 동지가 되었다.

구국민단은 다음의 두가지 목표를 표방하였다.

  1. 1. 일한합병에 반대하여 조선을 일본제국 통치하에서 이탈케 하여 독립국가를 조직할 것.
  2. 2. 독립운동을 하다가 입감되어 있는 사람의 유족을 구조할 것

목표 달성을 위해 1주일에 한번씩 금요일마다 수원 읍내에 있는 삼일여학교에서 회합하여 독립신문의 배포 등을 논의하고, 임순남, 최문순, 이선경은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의 간호부가 되어 독립운동을 도울 것을 맹세하였다. 하지만 젊은 청년들의 독립을 향한 비밀활동은 일제에게 발각되어 모두 체포되었다.

석방되도 다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겠소!

이선경 경기여고 학적부

이선경 경기여고 학적부

이선경은 1902년 5월 25일 경기도 수원면 산루리 406번지(현 수원시 팔달구 중동)에서 태어났다. 정식 이름을 얻기 전 애기(愛基)로 불렸던 이선경은 '석방 되도 다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겠소'라며 19살의 나이에 조국독립을 위해 순국하였다.

이선경은 집안이 수원에서 큰 부잣집이었던 덕에 일찍부터 수원 산루리에서 서울까지 통학을 하며 공부할 수 있었다. 이선경은 1918년 수원공립보통학교(현 신풍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4월 30일 서울의 숙명여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리고 2학년 때인 1919년 3월 5일 서울에서 학생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구속되어 3월 20일 무죄 방면 되었다. 이후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1919년 9월 1일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고)로 전학하였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 전학한 이선경은 2학년 성적과 3학년 성적만이 기재되어 있는데, 3학년 1학기의 경우 결석일수가 22일에 달하고 있다. 이에 이선경은 1920년 8월 31일 학교규칙에 따라 퇴학을 당하였다. 이것은 1920년 8월 구국민단 사건으로 체포되었기 때문이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고민하면서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하던 10대 소녀 이선경은 결국 박선태, 이득수, 임순남 등과 함께 일제경찰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후 너무나 가혹한 현실이 이선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선경은 체포 후 심문과정에서 병을 얻어 재판정에도 나올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다.

끝내 재판부는 이선경을 재판정에 세우지 못하고 재판을 진행하였다. 당시의 신문기사가 이 사실을 보도하고 있는데, 재판 이후 이선경의 순국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1921년 3월 12일

血復團 公判延期

연기된 원인은 지금 감옥에 잇난 피고의 병기때문

경기도 수원군 일형면 하광교리(京畿道 水原郡 日형面 下光敎里) 이득수(李得壽一九)와 밋 동도동군동면 남창리(南昌里) 박선태(朴善泰二0) 동면 북수리 여학생(北水里女學生) 임순남 (林順男一七) 동면 남수리 여학생(南水里女學生) 최문순(崔文順一七) 동면 산루리 여학생(山樓里女學生) 이선경(李善卿一八) 경성 종로통이정목이백칠십삼번지 윤익중(尹益重二五) 등이 조선독립하기를 희망하고 독립을 선언할 목적으로 (중략) 작일에 공판을 개정하려하얏든바 우 혈복단중 이득수와 밋 이선경 양명이 재감중에 병이 잇서 법정에 출두하기 불능함으로 다시 연기가 되얏는대 아즉 공판 기일은 정하지 안이하얏는바 피고인의 병이 쾌한것을 보아서 다시 공판기일을 정할터이더라

1921년 4월 박선태와 이득수는 징역 2년을 언도 받았고, 이선경을 비롯한 여학생은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도 받았다. 이에 구류 8개월만인 1921년 4월 12일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선경은 일제경찰의 혹독한 고문으로 석방되어 집으로 옮겨지자마자 9일 뒤 19세의 나이로 4월 21일 순국하였다. 마침내 조국독립을 위해 희생한 이선경은 순국한지 91년 만에 2012년 3월 1일 건국포장 애국장에 추서되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수원지역 독립운동의 꽃으로, 수원의 유관순으로 이선경은 다시 피어났다.

「혈복단 공판연기」 『조선일보』, 1921년 3월 12일자

「혈복단 공판연기」 『조선일보』, 1921년 3월 12일자

출처 : 수원문화원 - 수원을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