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영 / 수원화성박물관 전문위원

수원 부잣집에서 태어난 나혜석

나혜석(1896~1948)

나혜석(1896~1948)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인 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 : 1896~1948년)은 근대 한국사에 있어서 주목되는 선구자이다. "여자도 사람이외다!"라는 한마디 말만으로도 그녀의 불꽃같은 삶을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여자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인간해방과 자존의식을 위하여 기존의 인습과 사상에 반기를 든 인물이 바로 나혜석이다. 그녀는 미술, 문학 등 예술계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운동에서 여성운동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발자취를 남기며 여권 신장에 앞장선 신여성이었다.

나혜석은 시흥군수와 용인군수 등을 지낸 개명관료 출신인 아버지 나기정(羅基貞)과 수성최씨 최시의(崔是議) 사이에서 5남매 중 넷째로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 291번지(장안구 신풍동)에서 출생하였다. 나혜석의 형제자매는 나계석-나홍석-나경석-나혜석-나지석 등 2남3녀이다. 나혜석의 호적상 이름은 나아기(羅兒只)로 기록되어 있으며, 후에 나명순(羅明順)이라는 이름으로 지내다가 진명여학교 졸업 무렵인 1913년(18세)에 나혜석으로 개명하였다. 수원의 대표적 집안으로 일컬어지는 나주나씨 집안은 11대조가 수원부사로 임명되면서 수원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나혜석 할아버지인 나영완(羅永完)에 와서 호조참판을 지내면서 수원의 대표적 집안으로 성장하였다.

신여성으로서의 성장

개화사상을 일찍이 접한 나기정은 자녀 모두 신식교육을 시켰으며, 특히 전통사회에서 교육의 기회에서 밀려났던 딸들에게 당시에도 드물게 고등교육을 시켰다. 나혜석은 1910년 삼일여학교(현 매향중학교)의 1회 졸업생이 되었으며, 동생 지석과 함께 서울의 진명여학교에 진학하였다. 어려서부터 다재다능했던 나혜석은 도쿄(東京) 유학중이었던 오빠 나경석(羅景錫)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진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도쿄여자미술학교에 입학하여 한국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서양화를 공부하게 되었다.

17세의 도쿄 유학은 신여성 나혜석에게 많은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림뿐만 아니라 문학 그리고 사회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 이때부터이다. 당시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 동인지 「학지광(學之光)」에 발표된 나혜석의 글들은 그녀의 신여성관과 여성해방론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조선의 여성도 사람될 욕심을 가져야겠소...여자도 남자와 같이 그 본성에는 조금도 다름없다는 사상이 더욱 심오하게 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바와 같이 문예부흥시대로부터 현대에 지(至)하기까지오. - <잡감-K언니에게 여(與)함> 일부분, 1917년

나혜석의 여권운동에 관한 단면을 살필 수 있는 <우애결혼-시험결혼>이 게재됨.

「삼천리」(1930년)

유학시절 여권운동에 매진하던 나혜석은 1918년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와 정신여학교에 교사로 잠시 재직하였다. 이 무렵 신여성들의 고민은 여성해방도 중요했지만, 동시에 민족해방이라는 시대적 소명을 거스를 수 없었다. 1919년 나혜석은 이화학당 지하실에서 비밀리에 신마실라, 박인덕, 김활란, 신준려, 김마리아 등과 모여 3․1운동에 여학생 참가계획을 추진하다가 체포되어 5개월간의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사회적 냉대와 홀로서기

천후궁(1926년,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 특선)

천후궁(1926년, 제5회 조선
미술전람회 특선)

조선미술전람회 도록(1922~1932년) 나혜석은 1회부터 시작해 11회까지 참가하여 총 18점의 작품이 당선됨.

조선미술전람회 도록(1922~1932년)
나혜석은 1회부터 시작해 11회까지
참가하여 총 18점의 작품이 당선됨.

1920년 나혜석은 친일 관료인 김우영(金雨英, 1886~1958)과 결혼하여 교사직을 그만두고 남편을 따라 만주, 구미, 파리에서 생활하며,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할 그림을 그리고 기행문 등의 글쓰기에 전념하였다. 특히 1921년 화가로서 첫 개인전을 경성에서 개최하였으며, 고향인 수원에서도 1929년 '구미 사생화전람회'를 남수리 불교포교당(현 수원사)에서 열었다.

한편, 파리에서 있었던 나혜석의 자유로운 연애사건이 한국사회에도 알려지면서 가정불화가 생겼으며, 곧 남편 김우영도 새 살림을 차려 둘은 1931년에 정식 이혼하였다. 이혼 후 발표한 <이혼 고백서>(1934년,「삼천리」)에서는 자신의 결혼과 이혼 이야기를 솔직하게 쓰고,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정조관념을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써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다. 이후에도 이혼 후 겪은 사회의 편견과 인습에 얽매인 정조관념을 비판하는 글을 꾸준히 발표하며 여성에 대한 사회적 구조와 억압에 저항하였다.

1935년 수원 지동에 거처를 마련하여 이혼 후의 아픔과 시련을 이겨내고자 그림 그리기에 전력하였다. 재기를 위한 개인전을 열었으나 실패로 끝나버려 그녀의 사회활동과 작품활동도 사실상 종말을 고하였다.

당시 언론에서는 그녀의 사생활을 가십거리의 기사로 보도하였으며, 이러한 사회적 냉대는 그녀를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하였다. 말년의 그녀는 신경쇠약과 중풍환자로 52세의 나이로 서울 원효로의 시립자제원(현 용산경찰서 자리)의 무연고자 병동에서 외로이 생을 마감하였다.

나혜석은 자유분방한 연애와 파격적인 이혼 그리고 행려병자로서 삶을 마감한 파란만장한 생애로 더 유명한 여성이다. 그러나 그녀는 고등교육을 받은 신여성으로서 예술분야뿐만 아니라 여권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 등 다방면에서 다재다능한 능력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한 여성이었다. 나혜석이 인생의 질곡을 이겨가며 끝까지 지키고자한 것은 바로 그의 예술세계이며 인간적 자유이었다. 따라서 당대 활약하던 유명한 예술가들 사이에서 빈번하게 일어난 일제와의 타협과는 달리 신여성으로서, 화가로서, 작가로서 오롯이 그의 정신세계를 지켜낸 선구적 인물이 바로 수원 출신의 신여성 나혜석이었다.

2000년 수원시 인계동에 조성된 나혜석 거리의 나혜석 동상

2000년 수원시 인계동에 조성된 나혜석 거리의 나혜석 동상

출처 : 수원문화원 - 수원을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