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대식 / 시인, 교사

높고 아름다운 꿈을 찾아서

박승극

박승극

박승극은 1909년 12월 14일 수원군 양감면 정문리에서 출생하였다.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박승극은 고향에 대한 애정이 지극했던 인물이다. 수원군 양감면은 평택군 서탄면과 맞붙은 수원군의 끝자락으로 농업을 생업으로 이어온 곳이다. 박승극의 문학 속의 이야기들은 대개 그런 고향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데, 그는 6·25 전까지는 고향을 오래 떠난 본 일도 없었다.

박승극이 최초로 교육을 받은 곳은 보신강습소로 알려져 있다. 1923년 4월에 양감면 사창리에 설치된 보신강습소 2학년에 입학했다가 여름방학이 끝난 후 중퇴하고 1924년 서울 배재고보에 입학하였다. 배재고보에는 당시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여든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배재고보는 김기진, 박영희, 박팔양, 나도향 등 당대 최고의 문인들을 배출한 명문이었다. 박팔양 시인은 같은 수원 출신으로서 서로 교분을 나누었고 훗날 박승극이 주도한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카프)수원지부 문학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배재고보를 졸업한 박승극은 일본 동경의 일본대학에 입학하지만 한 학기 만에 스스로 그만두고 귀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제국주의에 끝없이 대항했던 그의 일생을 보면 아마도 제국주의 교육에 대한 불신이 깊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박승극은 1929년 자신의 고향에 신흥학당을 열어 어려운 청년들을 교육하였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최영신의 실제 모델인 최용신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그녀의 흔적을 찾아 나서기도 하였다. 낙후된 지역사회의 교육운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고향에 헌신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은 바뀌어야 한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주의는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것은 당시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사실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노동자·농민 등 가난한 계급에 속한 민중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수탈과 동시에 지주나 자본가들에게서도 이중으로 수탈당하면서 삶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박승극은 고향의 현실 속에서 민중들의 고통 받는 삶을 직접 체험하였으며 그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주의를 바탕으로 한 진보주의 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수원, 오산, 평택 등에 설립된 진보 단체의 핵심에는 늘 박승극이 있었다. 수원청년동맹, 신간회수원지회, 수진농민조합 등의 단체에서 주요 인물로 활동했으며 가난한 민중들의 편에선 문학단체인 카프 수원지회를 이끌기도 하였다. 당시 카프는 최고의 지식인들로 구성된 최대의 문학 단체였다. 박승극은 카프 수원지회를 설립하고 최고의 문인들을 동원하여 수원에서 문학강연을 주도하였으며 미술전람회도 개최하였다.

또한 『조선일보』 수원지국을 운영하며 수원기자 동맹 창립부터 조사부장으로 적극 참여하여 세상을 바꾸고자 힘썼다. 1928년에는 수원 신간회 대회에서 의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신간회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망라한 우리 민족 최대 민족 통일운동단체였다. 박승극은 가난한 사람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꾸었고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박승극의 선택이 방법론적으로 지금의 우리 입장과 다르기는 하지만 당시 그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 올곧게 산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문학을 넘어, 역사 속으로

박승극 문학전집

박승극 문학전집

박승극은 1909년 12월 14일 수원군 양감면 정문리에서 출생하였다.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박승극은 고향에 대한 애정이 지극했던 인물이다. 수원군 양감면은 평택군 서탄면과 맞붙은 수원군의 끝자락으로 농업을 생업으로 이어온 곳이다. 박승극의 문학 속의 이야기들은 대개 그런 고향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데, 그는 6·25 전까지는 고향을 오래 떠난 본 일도 없었다.

박승극이 최초로 교육을 받은 곳은 보신강습소로 알려져 있다. 1923년 4월에 양감면 사창리에 설치된 보신강습소 2학년에 입학했다가 여름방학이 끝난 후 중퇴하고 1924년 서울 배재고보에 입학하였다. 배재고보에는 당시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여든 것으로 유명하다.

박승극 생가

박승극 생가

출처 : 수원문화원 - 수원을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