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민 / 수원박물관 학예팀장

유랑과 추방과 망명, 그리고 황홀한 근대

김세환

김세환

한국 근대사를 빛나게 했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수원에는 많았다. 그들에 대한 평가의 오호를 떠나 우리 근대를 볼품 있게 만들었던 사람들이다. 음악의 홍난파와 미술의 나혜석과 홍득순, 문학의 홍사용․박팔양․박승극․최순애․김승구 등등…. 그들의 이름은 수원을 뛰어넘는다.

그러나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유랑과 추방과 망명의 시대'였다. 민족대표 48인으로 수원지역 3.1운동을 이끌었던 김세환이 재판정에서 말한 것처럼 아무리 세계대세로 일제에 의해 한국이 병합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항상 가슴속에 원한을 품고 살아갔다. 이러한 울분은 민족사적 분수령이었던 3.1운동을 만들었다. 1920년대는 3.1운동이 만든 시대였다. 이때 한국 근대사회를 위한 실험들이 포괄적으로 진행되었고 이후 역사를 규정하는 다양한 생각과 집단들이 출현하였던 것이다. 일제강점기는 세계사적으로 자본주의 발전이 심화되는 제국주의 시대였다. 그럼에도 식민지 조선에도 새로운 모던 보이와 모던 걸들이 넘쳐났다. 시인 박팔양의 표현대로 그들은 '근대의 황홀한 무지개'였다. 이들에 의해 새로운 문화와 운동이 선도되었다. 자유와 해방, 자유연애와 자유결혼, 사회주의, 그리고 낭만과 퇴폐 등등…. 온전히 내화된 삶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실천한 사람들은 차라리 행복하였을 것을, 식민지 시대는 그것을 왜곡과 굴절로 대답하게 만들었다. 자본주의의 황홀함과 제국주의적 폭력이 공존하던 그 시대와 불화하던 그들의 서성거림을 발견할 수 있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고향과 환향

홍사용

홍사용

근대적 문화의 여명기에 빛나는 존재들이었던 그들 가운데 근대 한국음악의 아버지로 일컫는 난파(蘭坡) 홍영후(洪永厚, 1898~1941)를 들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이래 지금까지 널리 애창되고 있는 <봉선화>와 <고향의 봄>의 작곡자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던 그는 홍난파로 더욱 잘 알려진 인물이다. 홍난파는 전공이 바이올린이었지만 작곡과 지휘 그리고 음악교육과 음악평론 등 다양한 음악활동을 펼쳤다. 때로는 출판과 작가로서 여러 단편을 발표하기도한 만능 예술인이었다. 1898년 남양 활초리에서 태어나 1941년 삶을 마칠 때까지 44년의 그의 삶은 온전히 한국 근대양악사였다. 그러나 경쾌하고 장중한 서양음악을 좋은 음악으로 여기며 열정적으로 계몽·보급하려 한 그의 '민족음악 개량운동'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를 위한 친일음악으로 변질되었다. 조선음악에 대한 미학적 탐구와 민족 현실에 대한 역사의식이 없는 순수음악의 지향은 결국 어용적 친일음악으로 전락하였다. 그는 수원의 지역적 연고를 갖고 활동하지도 못하였음에도 해방 후 홍난파는 수원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지역의 각종 음악단체를 추동하는 열쇠말이었다. 수원 팔달산 중턱에 난파기념비를 세우고 난파음악제 등을 만든 수원사람들이다.

노작 홍사용(洪思容, 1900~1947)은 그나마 행복한 축이다. 1920년 박종화·정백과 『문우』를 창간하였고, 문화출판사를 설립하여 1922년 『백조』를 발간하면서 그의 시대를 열었다.

1923년 토월회를 이끌고, 토월회 이후 극단 산유화회와 신흥극장을 조직하여 연극운동을 주도했다. 그 많던 재산을 문학과 연극 등 문화운동에 소진하고 각혈과 검열로 붓을 꺾었기에 그는 온전하게 고향 동탄에 '노작홍사용문학관'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의 시인은 숱한 여인의 가슴을 설레게 했고, 지금은 고향에서 다시금 문학의 패왕이 되었던 것이다.

태양을 등진 거리의 그들

박인서 가옥 전경(박팔양)

박인서 가옥 전경(박팔양)

수원 곡반정동에서 태어난 시인 박팔양(朴八陽, 1905~1988)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37년 만주에서 시집 『여수시초(麗水詩抄)』를 출간한 그는 해방 후 이북에 머물며 그쪽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1988년 월북작가들이 해금이 되고 난 뒤 박팔양 시선집 『태양을 등진 거리』가 1991년 서울에서 출판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한 땅에서 박팔양은 태양이 내리쬐는 양지에 서 있지 못하다. 어린시절 먼내에서 멱감고 놀던 곡반정동은 개발로 옛 마을의 맛을 잃었다. 그곳 박팔양 생가는 그 동네에서 유일한 한옥으로 개발의 와중에 위태롭게 서 있다. 박승극(朴勝極, 1909~ ?) 역시 마찬가지로 월북 작가이다.

수원을 대표하는 사회운동가로 기억되지만 수필과 소설을 쓴 문학가였다. 민촌 이기영의 『고향』 만큼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소설들은 당대 농촌의 현실을 핍진하게 그려내고 있다. 당시 수원사람들의 입말이 주는 생생함과 함께 농촌현실의 사실적 묘사는 당대 수원을 형상한 탁월한 문학적 성취이자 자산임에 틀림없다. '산하유정'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극작가 김승구(金承久(金相福) 1914~1994) 역시 월북으로 잊힌 이름이다. 나혜석 이후 수원미술의 맥을 이은 홍득순(洪得順, 1910~ ? )과 아동문학가 이원수와 결혼한 동시 '오빠생각'의 주인공 최순애(崔順愛, 1914~1998)조차 우리는 수원사람으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수원을 넘어 근대한국을 나름 볼품 있게 만들었던 그들을 친일과 용공의 덫에서 벗어나 제대로 돌아볼 때가 되었다.

출처 : 수원문화원 - 수원을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