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현영 / 수원시사편찬위원회 연구원

「오빠생각」의 소녀, 「고향의 봄」 소년을 만나다

어린이운동에 헌신한 방정환이 창간한 잡지 『어린이』 1925년 11월호에는 최순애(1914~1998)의 동시 「오빠생각」이 실린다. 수원 북수리 125번지에 사는 열두 살 소녀였다. 다음해 4월호에는 마산 사는 열여섯 살 소년 이원수(1911~1981)의 「고향의 봄」이 실린다.

오빠생각(최순애)

오빠생각(최순애)

최순애의 「오빠생각」은 작곡가 박태준이 1930년에, 이원수의 「고향의 봄」은 작곡가 이일래에 이어 홍난파가 1927년에 곡을 붙여 세상에 내놓았다. 두 노래는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이 즐겨 부르는 동요가 되었다. 이원수와 최순애는 『어린이』에 실린 동시로 알게 되었고, 곧 친구가 되어 칠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원수와 최순애가 더 가까워진 것은 '기쁨사' 동인이 된 뒤부터였다. '기쁨사'는 『어린이』에 동시를 발표한 사람들끼리 만든 문학 동인이었다. 이들은 서울, 수원, 대구, 울산, 마산 등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한자리에 모인 적은 없으나, 편지로 소식을 전하며 문학 활동을 함께했다.

1935년 두 사람은 수원역에서 첫 만남을 약속했다. 최순애는 약속한 시간에 기차역으로 나가 이원수를 기다렸다. 이윽고 기차가 도착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플랫폼을 다 빠져나왔는데도 끝내 원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그 무렵 경제적 곤란을 이유로 여러 곳의 결혼중매를 마다해 오던 터이었지만 오랫동안 정다운 편지로 사귀어 온 최순애를 모른 체할 수 없어 만나 이야기부터 해 보자 하고 편지로 수원행을 알렸던 것이다. 나는 편지에 내가 입고 가는 양복의 빛깔과 소지품을 일러 주어 수원역에 나오겠다는 최순애에게 얼른 알아 볼 수 있게 써 보냈다. 이렇게 해서 내일 오후 기차를 타고 모레 아침 일찍 수원역에 닿기로 되어 있었는데 뜻밖에도 나는 함안경찰서 형사에게 붙들려 취조를 받고 어두컴컴한 유치장에 갇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 그러나 수원역에서 나를 기다리고 헛걸음을 하고 돌아갈 최순애를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누가 이 사정을 알려 주기나 하겠는가. 답답할 뿐이었다.
-이원수, 「흘러가는 세월 속에」 중에서(이원수 문학관 홈페이지)

이원수는 수원으로 떠나기 전날 '함안독서회사건'으로 체포되어 경찰서 유치장에 갇힌 몸이었다. 그는 한 차례 취조를 받은 뒤 검찰로 옮겨졌고, 거기서 또 심문을 받고 재판에 부쳐지고 하는 사이에 1년을 보냈다.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은 이원수는 감옥살이 후 몸이 많이 수척해졌다. 그런 중에도 순애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은 매우 절실한 일이었다. 최순애는 집안에서 "그런 사람 위험하니 다른 데로 시집가라."고 했으나 다행히 오빠 최신복이 감싸줘 견뎌낼 수 있었다. 그들의 사랑을 확인케 한 위 사건을 계기로 둘은 1936년 6월 결혼을 했다. 한국 아동문학계의 대표적인 부부 문학가가 탄생한 것이다.

수원 오누이, 민족의 마음을 사로잡다

최신복

최신복

최순애가 「오빠생각」에서 그렇게 그리워한 사람은 오빠 최신복(1906~1945)이다. 최영주(필명)로 더 알려진 최신복은 배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했다. 귀국 후 그는 수원에서 화성소년회를 이끌며 방정환을 초대하여 동화구연회를 여는 등 소년운동에 앞장섰다. 동화구연회에서 방정환의 얘기를 듣고 입회 순사가 울었다는 유명한 일화도 이때의 이야기다<최영주, 「순검과 소파」, 『어린이』 1931년 8월호>. 「오빠생각」의 가사 중 비단 '구두'는 처음에 비단 '댕기'로 지은 것을 최신복이 고쳐 주었다고 한다.

동아일보사 수원지국 기자였던 최신복은 방정환의 부름을 받고 1929년 개벽사에 들어가 『어린이』, 『학생』, 『소년』 등의 편집을 맡았다. 1931년 방정환이 세상을 뜨고 5년 후 최신복은 윤석중, 정순철, 마해송, 이정호 등과 '소파 묘비 건립 모금' 광고를 내고, 망우리 아차산에 묘를 만들고 묘비도 세웠다. 또 자신이 편집 및 발행인으로 있던 박문서관에서 『파전집』을 내는 데도 앞장섰다.

최신복은 아버지의 묘(1937년 별세)도 수원의 선산 대신 소파 묘 아래쪽에 마련했다. 방정환의 후원자였던 아버지와 소파의 묘를 자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그 뒤 모친과 갓 나서 죽은 아들도 이곳에 묻었고, 40세에 자신도 지병으로 세상을 뜨며(1945년) "존경하는 선배 소파의 밑에 묻어 달라." 유언해서 방정환 바로 앞에 묻혔다. 최신복의 묘비에는 그가 쓴 「호드기」가 새겨져 있다. "누군가 부는지 꺾지를 말아요./마디가 구슬픈 호드기오니/호드기소리를 들을 적마다/내 엄마 생각에 더 섧습니다." 최순애 가족의 동시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최순애의 여동생 최영애가 10살 때 쓴 「꼬부랑 할머니」도 『어린이』잡지에 입선되었다.

꼬부랑 깡깡이 할머니는
집행이 집고서 어데 가나
꼬부랑 고개를 넘어가서
솔방울 줏으러 가신단다.

꼬부랑 깡깡이 할머니는
저녁에 어데서 혼자 오나
꼬부랑 고개를 넘어가서
솔방울 이고서 오신단다.
-최영애, 「꼬부랑 할머니」 전문(『어린이』, 1925년 4월)

이렇듯 수원의 오누이 최신복, 최순애, 최영애는 우리 민족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한국 '아동문학 100년에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었다.

결혼 후 수원 최순애의 집에서 찍은 가족사진

결혼 후 수원 최순애의 집에서 찍은 가족사진
(뒷줄 좌로부터 이원수, 최순애, 최신복의 부인 차원순, 최순애의 막내 여동생
앞줄 최순애의 아버지 최경우, 어머니 마씨, 그리고 최신복의 자녀들)

출처 : 수원문화원 - 수원을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