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미애 / 수원박물관 전문위원

'죽어 한 줌 재 되어도 우리 땅 독도를 지키겠노라'는 굳은 의지로 '독도지킴이'를 자처했던 사운史芸 이종학李鍾學! 이종학은 우리 역사와 영토를 지키기 위해 평생을 사료 수집과 연구에 열정을 쏟았고, 사료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하여 후대에 제대로 된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주변국들의 역사왜곡에 자료로 당당하게 맞서 우리 역사지킴이로 한 평생 열정을 쏟아부었던 이종학의 나라사랑 마음과 그의 활동을 되새기고, 지금 우리의 역할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운 이종학

사운 이종학

이종학은 1927년 10월 1일 경기도 수원군 우정면 주곡리 244번지(현재 화성시 우정읍)에 태어났다. 8세 때 아버지 이세기李世基를 여의고, 할아버지 이병준李丙駿과 어머니 김아기金岳只 여사의 보살핌 속에 자랐다. 어릴 적에는 여느 시골 아이들처럼 서당을 다니면서 한학漢學을 배운 후 삼괴보통학교를 거쳐 삼괴고등공민학교에 진학하였다. 해방 직후 고등고시를 목표로 잠시 건국전문학교에서 법률 공부를 하였으나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곧바로 공군에 자원입대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책읽기를 좋아했던 이종학은 휴가를 나올 때마다 형편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꼭 서점에 들러 책을 구입해 독서할 정도로 책을 가까이 하고 매우 좋아하였다.

군 제대 후 서울로 거처를 옮기고 1955년 서울 종로5가에 '권독서당'이라는 책방을 냈다. 이후 상호를 '연홍서림'으로 잠시 바꾸었다가 연세대학교 앞에 '연세서림'을 열면서 본격적으로 고서를 수집하였다. 시간만 나면 인사동 고서점에 들러 좋은 사료가 있는지 찾아다니자 나중에는 서점 주인들이 좋은 고서가 입수되면 제일 먼저 이종학에게 연락하였다고 한다. 고서 수집과 사료에 대한 애정은 자연스럽게 사료의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眼目도 키워주었다.

역사와 만나다-이순신 장군과의 만남

고서점을 운영하던 어느 날 교육자이자 유명한 장서가이던 서인달徐仁達로부터 그가 수집한 고서와 고문서 등의 사료를 일괄로 인수받게 되었다. 그 중 충무공 이순신 장군 관련 사료를 깊이 접하게 되면서부터 이종학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초서체로 쓰여 진 『난중일기亂中日記』를 제대로 읽기 위해 전문가의 조언을 받으며 백번 이상 읽으며 『난중일기』의 잘못된 번역을 바로잡았고,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길을 따라 전국을 순례하며 이순신 장군이 잠시 머물렀던 섬까지도 현장 답사하였다.

이종학은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정리하기 시작하면서 새로 발굴한 자료들을 발표하였다. 먼저『해장집海臧集』「유한산도기遊閑山島記」를 통해 거북선 머리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몸통으로 들락날락하는 구조였음을 처음으로 밝혀 거북선에 대한 재고증이 필요함을 학계에 제기하였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왜군으로부터 항복받은 것을 기념해 세운 통영 수항루受降樓의 실체를 알 수 있는 사진을 찾아내고 1987년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수항루의 복원을 성사시켰다. 또한『반곡집盤谷集』에 의거 이순신 장군이 수전水戰 뿐만 아니라 육전陸戰에도 능했음을 밝혀내었고『태촌선생문집泰村先生文集』에 나타난 이순신 장군의 용모 묘사 부분을 근거로 삼아 이순신 장군의 표준 영정이 잘못되었음을 주장하여 역사문화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우리 역사가 상당부분 왜곡되고 잘못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나부터라도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사료 수집 뿐 아니라 연구 활동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역사의 김매기를 시작-역사왜곡에 맞서다

삼국접양지도, 1785년(영인본)

삼국접양지도, 1785년(영인본)

이종학은 "역사가 천만년 누릴 정신의 옥토라면 지금 제대로 갈아주는 것이 중요하다"며 '역사를 김매기'한다는 뜻의 '사운史芸'이란 호를 스스로 짓고 자신의 아호雅號로 삼았다. 이후 그의 연구는 우리의 영토와 한일관계로 그 폭이 넓어졌고 사료 수집 또한 일제의 불법 한일합방에 대한 사료와 우리 영토 관련 사료를 다방면에 걸쳐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사료 수집을 하던 중 일본의 역사 왜곡 문제는 국내에 존재하는 사료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고, 일본 스스로가 만든 사료에서 그들의 모순을 찾는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수시로 일본을 방문하며 관련 사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와 독도 관련 사료를 찾으러 일본의 도서관과 고문헌 수집상을 제집 드나들 듯 하였는데, 이종학이 나타나면 '다케시마'가 왔다고 부르며 모두 알아보았다고 한다. 이종학이 특히 일본에서 만든 사료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일본 스스로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객관적 근거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감정적으로 화형식이나 서명운동을 하는 등의 일회성 행사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우리의 주장을 알리는데 한계가 있다고 여겨, 일본인 스스로가 수긍할 수 있는 사료로 우리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인식하였던 것이다. 이때 일본에서 발굴한 독도가 우리 땅임을 보여주는 일본 제작지도 등을 다시 일본에 기증하여 그들의 왜곡된 주장에 맞섰다.

그리고 '동해'는 방위 개념의 '동해'가 아니라 고유 명칭인 '조선해'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국내외를 다니면서 모은 독도 관련 사료들은 1997년 우리나라 최초의 영토박물관인 '독도박물관'에 대거 기증하면서 박물관 개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독도박물관 초대 관장직을 역임하며 독도지킴이를 자처하던 이종학은 1999년 한일간 신어업新漁業에 대한 협정을 체결할 당시,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고 독도박물관의 문을 닫고 그동안 맡아오던 관장직의 사직서도 제출하는 등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이종학은 독도 이외에도 1860년 북경조약으로 러시아에 속해 버린 녹둔도鹿屯島와 1909년 간도협약으로 인해 중국 땅이 되어 버린 간도間島 등 우리가 잃어버린 옛 영토를 되찾기 위해 관련 사료를 모으는데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독립기념관의 자료조사위원으로 위촉되어 국내 뿐 만 아니라 해외 조사에도 적극 참여하였으며, 민족의 잃어버린 시간과 영토에 대해서 늘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이종학은 한일강제병합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관련 사료 수집 차 일본 공문서관을 자주 드나들던 어느 날 드디어 한일강제병합과 관련한 극비문서를 발견하게 되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당시의 조선총독 데라우치가 병합 추진 과정을 기록한 비밀문서인「조선총독보고朝鮮總督報告 韓國倂合始末한국병합시말」이 그것이다. 당시 외부반출이 금지된 비밀문서이었으나 이종학은 기지를 발휘하여 원본과 똑같은 원색 복사본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1999년 7월 제기한 한일강제병합 무효 소송의 증거 사료로 일본 고등재판소에 제출하였다. 이어서 추가로「한국병합에 관한 서류-착전着電과 발전發電」,「추밀원 회의필기-한국병합에 관한 조약 외」등의 문서를 공개하여 일본이 얼마나 치밀하게 병합을 준비하였고 강압적으로 진행하였는지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고 한일강제병합은 무효라고 만천하에 주장하여 일본을 경악케 하였다. 이후 이종학은 일본 법정에 제출한 비밀문서 3건을 개인 비용을 아낌없이 쏟아 3개 국어(한국어․영어․일어)로 번역하고 책으로 출판하여 국내외 관계 기관 및 연구자들에게 배포하여 일본의 천인공로 할 만행을 온 세계에 알렸다. 이외에도 일제의 대륙침략사를 살펴볼 수 있는 각종 사진첩 및 화보집, 관습조사보고서, 일제 관찬 도서 뿐 아니라 조선의 근대 풍경을 살펴볼 수 있는 엽서 등도 수집하여 당시 연구 자료로 활용할 수 있게 하였다.

이종학은 일제 대륙침략에 대한 사료 수집과 조사를 통해 남과 북이 한 목소리로 일본의 배상과 사과를 받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꾸준한 노력 끝에 2001년 평양에서 '남북 공동 자료 전시회'를 개최하게 된다. 이종학이 평생 모아 온 자료들을 전시하게 되었고, 전시 자료 중 일부는 북에 기증하였다. 또한 전시회를 통해 남북의 역사학자들이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되었으며 남북한 역사 연구 교류의 물꼬를 트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수원 '화성華城'을 지켜내다

화성성역의궤, 1996년(영인본)

화성성역의궤, 1996년(영인본)

이종학은 고향에 대한 지역사 연구도 꾸준히 진행하였다. 그 중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업 중 하나가 '화성華城'의 제이름 찾기였다. 일제가 우리 문화를 격하시키기 위해 지어 사용하던 '수원성'이란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맞지 않으니 본래의 제이름을 찾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1996년은 화성 축성 200주년이 되는 해였는데 이를 기념하며 화성의 제이름을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화성성역의궤』을 영인해서 보급하였다. 금속활자와 판화의 미감을 제대로 전하고자 한지에 실물크기 원형대로 정성들여 영인 제작하였던 것이다. 특히 해제와 간행사를 영어로 번역 첨부하고 해외 한국학 연구기관에 무료로 기증하여 화성의 우수성을 널리 알렸다.

때마침 수원시에서는 화성 축성 200주년을 기념하면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화성을 등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시기이다. 심사단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많이 훼손된 화성이『화성성역의궤』에 의거 원형에 가깝게 복원된 것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마침내 화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게 되었다. 이때 심사위원들의 결정에 이종학이 영인 제작한『화성성역의궤』가 큰 역할을 하였음은 너무도 유명한 일화이다. 이같은 노력으로 인해 1997년 12월 마침내 세계문화유산 등재 시 이종학의 염원대로 '화성'이라는 본래의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

이렇게 '화성'이 제이름을 찾게 되자 이종학은 관련 학술기관 등에 제대로 된 명칭의 사용에 대한 협조를 구하는 한편 '수원성 200주년 축성 기념 우표'의 명칭 오류를 들어 판매 금지를 요청하는 재판도 신청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으로 인해 화성의 역사와 명칭을 바로 잡고 새롭게 출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종학이 뛰어난 안목으로 의궤를 적극 활용하자 그동안 무관심 속에서 방치되오던 의궤가 새롭게 조명 받게 되었으며 훗날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의 고향인 수원군 우정면은 1919년 3·1 운동이 전국에서 가장 격렬하게 일어났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였다. 당시 치열했던 만세운동으로 인해 크게 놀란 일제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제암리 학살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치열했던 항쟁의 순간을 잊지 않고 후세에 남기고자 화수리 3·1만세운동 유적지에 비문을 직접 지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수원 '화성華城'을 지켜내다

이종학

이종학

이종학이 평생 수집하고 발굴해 낸 사료들은 매우 방대하다. 분야별 사료 하나하나가 가치를 지니고 있어 당장 연구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자료들이 사장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연구되어 후대 우리 역사를 바로 아는 데 쓰이길 기대하였다. 그리하여 일제침략관련 사료는 독립기념관에, 이순신 장군 관련 사료는 현충사와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에 기증하였다. 또한 독도 관련 지도와 서적 등은 독도박물관에 기증하였고, 동학혁명과 관련된 자료들은 천도교에 기증하여 전시와 연구에 활용될 수 있도록 하였다. 어떠한 대가를 바래서가 아니라 후대가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게 되길 간절히 염원하는 그의 뜻을 이종학 사후 유가족들이 이어 그가 남기고 간 유물 2만 여점을 수원시에 기증하게 된다. 각 기관에 기증된 사료들은 현재 전시와 연구를 통해 역사연구에 활용되고 있다.

한편 1996년 '사운연구소'를 개소하여 그동안 수집했던 사료들을 정리하며 책자를 꾸준히 발간하게 되었다.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전30권과 『한일어업관계조사자료』,『조선통어사정』,『일본의 독도정책 자료집』 등을 발간하여 독도 등 영토와 관련된 대일 관계 사료들을 정리하였다. 또한 일제 침략과 관련한 『1910년 한국강점자료집』,『일한병합시말』,『조선심교시말』 등을 출판하였다. 발간 책자도 올바른 역사 연구에 활용되길 바라며 필요한 기관과 연구자들에게 선뜻 기증하였다.

이종학은 평생 우리 역사바로세우기에 온 열정을 쏟아 부었다. 스스로를 역사지킴이로 여기며 역사적 사실을 증명할 때는 어느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우리가 역사를 지키기 못하고 물러나야 할 때 안타까워하였으며, 더욱 더 사료수집과 연구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노력과 열정은 기증을 통해 후대에게 우리 역사를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이종학이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한 노력을 얼마나 기울이고 있는가? 이종학이 후세를 위해 김매기 해 놓은 역사의 터전 위에 우리는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맺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때이다.

출처 : 수원문화원 - 수원을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