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 / 수원박물관 학예연구사

원효와 의상스님의 해골물 사건

범어사 의상대사 영정

범어사 의상대사 영정

전국의 오래된 사찰들을 보면 원효와 의상스님의 이름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 드물 정도로 많다. 두 인물이 한국 불교계에 그만큼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뜻일 것이다. 원효대사는 617년(진평왕 39) 지방 변방에서 태어난 6두품 출신으로 불교의 대중화에 평생 힘쓰다 돌아가신 분이다. 반면 의상대사는 귀족출신 집안에서 원효대사 보다 8년 늦은 625년(진평왕 47) 경주에서 태어났으며, 중국으로부터 화엄학을 들여 온 화엄종의 개조로 유명하다.

닿고자 하는 목표는 같았으나 가는 길이 달랐던 두 사람. 그 둘의 차이를 분명히 보여주는 일화 중의 하나가 바로 해골물 사건이다. 당나라에서 화엄교학이 크게 일어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의상은 친 형님처럼 따르던 원효대사와 함께 당나라로 향하다 고구려군에게 잡혀 첩자로 오인 받아 수십일 동안 잡혀 있다가 신라로 돌아오게 된다.
10년 뒤인 661년(문무왕 1) 두 스님은 다시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는데 당주(唐州)의 경계에 이르러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려 하는 순간, 큰 비를 만나 길가의 토굴에 겨우 몸을 숨겼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 곳은 무덤으로, 자고 난 옆에는 해골바가지가 뒹굴고 있는 게 아닌가. 이 일화는 의상대사와 관련하여 『송고승전』에 전해지는 이야기이다. 이때 해골바가지에 괸 물을 마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보고 있다.

원효대사는 이 사건으로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깨달음을 얻고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의상대사는 죽음을 무릅쓰고 홀로 중국으로 향해 화엄의 진리를 얻어 돌아오게 된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당시 중국으로 가는 여정이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육로로 시도하였으나 고구려군에게 잡혔고, 결국 두 번째로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바닷길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위에서 언급된 배를 탄 '당주(唐州)'는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당은포를 선택한 신라

대당무역로-당은포로

대당무역로-당은포로

삼국 중 가장 후진국이었던 신라는 6세기 중반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이를 둘러싸고 그 원인에 대해 다양한 측면에서 연구해 왔는데, 그 중의 하나가 당은포(당항진) 확보로 경기만 일대의 해상권을 장악하면서 독자적인 대외교류를 시작했던 점을 들고 있다. 경기만은 인천, 강화지역을 중심으로 북쪽의 장산곶과 남쪽의 태안반도와의 사이에 형성된 만으로 부속 만으로 해주만, 강화만, 남양만, 아산만 등이 있다. 경기만은 서해안을 낀 해상교역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당은포는 현재의 아산만이나 남양만 일대로 추정하고 있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다만 당은포의 배후 거점이었던 당항성으로 거론되는 화성시 당성의 위치나 자연지리적 배경을 보더라도 남양만 일대를 벗어나기는 어려운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당은포는 이미 신라가 진출하기 이전부터 경기만의 주요 거점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신라가 이를 개발함으로써 국제교역항으로 바뀌었다. 신라가 한강하류 지역을 백제로부터 빼앗은 것은 553년의 일이었다. 하지만 동맹국이었던 백제의 반발을 불러 564년 관산성에서 대규모 전투를 치르게 된다. 이 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함으로써 한강 하류지역은 완전히 신라의 것이 되었다.

동맹국이었던 백제를 배신하면서까지 신라가 이 지역에 목숨을 걸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단순한 영토 확장보다는 서해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 마련이라는 필요성 때문으로 보고 있다. 6세기 전반까지 신라의 대중국 교역은 고구려나 백제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는 신라가 국제사회에서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대내적인 발전을 하는 데 장애물이었다. 따라서 한강하류지역의 확보는 신라에게 있어 대중국 교역로의 확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국제교역항으로 성장한 당은포

신라가 당은포를 대중국 교역의 거점으로 만드는 일은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557년 국원소경이 설치되고 이듬해 한강유역에 대한 군사와 행정 지원을 목적으로 신라의 귀족층과 가야계 사람들을 대거 이주시켰다.

당시 신주(新州)군주는 가야계 귀족인 김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으로 해상왕국 김해가야의 왕자 출신이었다. 비록 멸망한 가야계 귀족이지만, 해상활동에 상당한 입지를 가진 인물로 당시 신주군주는 행정과 군사를 총괄하고 있었기에 당은포 건설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문화나 학술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상업과 기술 분야의 사람들도 대거 이주해 옴으로써 당은포 개척에 어느 정도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당은포는 진흥왕대 이후 신라 최대의 교역항으로 대외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특히 대중국외교의 중요한 거점으로 이곳을 통해 중국의 선진문물이 신라에 유입되어 국가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주요 원동력이 되었다.

출처 : 수원문화원 - 수원을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