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득 / 정조대왕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사도세자 묘를 옮기라

1789년 7월 11일 정조의 고모부인 금성위 박명원은 상소를 올린다. 배봉산에 있는 사도세자의 무덤인 영우원을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정조는 즉시 2품 이상 중신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열고, 수원 화산으로 옮기겠다는 결정을 한다. 정조의 신속한 결정은 이미 마음속으로 영우원 천봉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언제부터 그러한 생각을 했을까?

사도세자의 묘인 융릉 전경

사도세자의 묘인 융릉 전경

옛 사람들이 조상의 무덤을 옮길 때는 집안에 우환이 있다든지, 원래 안 좋은 자리에 모셔서 보다 좋은 자리로 옮겨 모시는 등이 이유였다. 그러나 왕세자의 무덤을 원래 안 좋은 자리에 썼을 이유가 없다면, 국왕인 정조에게 어떤 우환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바로 왕위를 이을 자식이 없었던 것이다.

정조에게는 1782년 9월 7일 궁인(宮人) 성씨에게서 얻은 세자가 있었다. 정조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라던 세자는 1786년 5월 11일 병환으로 급서(急逝)했다. 정조는 왕실의 혈통을 잇는 것은 물론, 아버지 사도세자의 추숭을 대행해줄 아들을 잃었기에 깊은 슬픔에 빠졌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한숨만 쉬고 있을 수 없는 것이 국왕의 자리이다.

사도세자의 원기를 받으려면

당시 정조에게는 정비(正妃)인 효의왕후와 후궁도 있었으나 아무도 자식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문효세자를 가슴에 묻은 정조는 다시 아들을 보기 위한 조치로 후궁을 들이기로 했다. 1787년 2월 11일 반남 박씨 가문의 규수를 삼간택을 통해 맞이했는데, '후궁은 임신을 한 뒤에 관작을 봉하라.'는 선왕의 수교(受敎)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빈(綏嬪 1770~1822)이란 빈호를 부여했다. 왕비를 맞을 때나 진행하는 삼간택 절차를 진행한 것에서 수빈 박씨에게 건 기대한 정조의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다. 바로 많은 자식의 생산을 바라면서 왕비와 같은 대우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수빈 박씨 역시 2년이 지나도록 회임(懷妊)을 못 했고 1789년이 되자 정조의 나이는 38세가 되어 당시로서는 상당한 고령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초조해진 정조가 꺼내든 마지막 방법은 주자가 언급했던 '혈식구원'의 계책으로서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기는 것이었다. 사도세자의 경우 의소세손, 정조,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 등 5명의 아들을 낳아 인조 이후 최다의 번식(繁殖)을 했기 때문이다. 즉, 풍수가에서 이야기되는 동기감응(同氣感應)에 의한 방법으로 생부인 사도세자의 원기(元氣)를 받아서 아들을 생산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정조는 우선 신하들의 동의를 얻어야 했고, 좋은 자리를 찾아야 했다. 정조는 문효세자가 죽기 전인 1785년 영우원 행차에서 배봉산을 두루 살펴보면서 신하들에게 '정말 좋은 자리'라고 했던 몇 년 전 자신의 발언을 뒤집어야 하는 것인데, 스스로 할 수는 없었다. 이에 정조는 고모부 박명원에게 부탁하여 의견을 내게 했다. 영조 때부터 왕실의 굳은 일을 도맡아 처리하던 박명원은 이번에도 정조의 뜻에 따라 영우원에 문제가 있다는 상소를 한 것이다. 신하들도 정조와 왕실의 사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동의하여 주었다.

사도세자를 화산으로

정조는 사도세자를 모실 새로운 자리로 이미 수원 읍치의 주산인 화산을 점찍어 두고 있었다. 수원은 효종을 모시려고 산릉공역을 시작했으나 당시의 경제력으로 읍치를 옮기게 되면 막대한 경제적 부담이 있을 것으로 본 송시열의 반대로 중단된 전력이 있었다. 18세기 후반의 정조시대는 그 정도의 부담을 감당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정조의 고민은 오히려 수원보다 더 좋은 자리가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정조는 50여 곳에 이르는 후보지를 모두 점검했던 것이다.

정조는 수원보다 좋은 자리가 없음을 확인하고 곧바로 수원 화산을 묘 자리로 결정했다. 더구나 정조는 재궁을 현실(玄室)에 안치하는 날짜와 시간까지 이미 결정하고 있었다. 연운(年運)과 산운(山運), 본명운(本命運)이 합일되는 날짜를 기다렸다는 정조의 언급이 있었고, 정확한 시각을 맞추기 위해 김영(金泳)으로 하여금 한양을 중심으로 시간을 다시 계산하게 했다.

융건릉

융건릉

약 3개월 안에 공사를 마치기 위해서는 강화도의 석재를 옮기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수원의 앵봉에서 양질의 석맥을 찾아 단번에 해결한 것을 정조의 현몽(現夢)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한 신하들의 태도를 보면 현륭원 조성에 쏟은 정조의 정성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정조는 현륭원의 광중을 파내려갈 때 여러 번 흙의 상태를 확인했다. 과연 십전보전의 대길지(大吉地)가 맞는지를 살폈던 것이다.

현륭원, 사도세자의 음덕을 드러내다

그러한 정성으로 옮겨진 현륭원(顯隆園)에 1789년 10월 7일 사도세자의 재궁이 안치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빈 박씨에게서 태기가 있더니 다음 해 6월 왕자가 태어났다. 정조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왕자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사도세자의 음덕으로 평가함으로써 사도세자의 위상이 자연히 높아지고, 1795년에는 국왕에게나 올리던 8자 존호와 금보(金寶)를 올렸다. 이제 사도세자의 국왕추숭은 시간문제가 된 것이다.
출처 : 수원문화원 - 수원을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