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호 / 수원화성박물관장

음택풍수와 양택풍수의 조화

화성(華城)이란 좁은 의미로는 5.7km에 달하는 성곽 자체를 가리킨다. 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성곽에 딸린 50여 시설물은 물론 관청․도로․상가․다리와 같은 도시기반시설과 저수지․둔전 같은 생산기반시설, 주변의 유형․무형 문화유산을 통칭한다. 아울러 화산에서 팔달산 동쪽으로의 읍치(邑治) 이전 후 수원부의 화성유수부 승격에 따른 행정명을 이르기도 한다.

정조는 재위 13년만인 1789년 10월 7일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원침(園寢)을 지금의 화성군 태안읍 안녕리 화산(花山)으로 옮긴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관아와 민가를 지금의 수원의 중심부인 팔달산(八達山) 동쪽 기슭으로 옮겼다. 이후 1793년 수원부가 화성유수부로 승격되었고 1794년 1월부터 1796년 9월까지 화성이 축조되었다.

화성 성역(城役)은 당쟁에 휘말려 비명에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조선에서 가장 좋은 자리로 옮기고자 하는 정조의 염원에서 비롯되었다. 사도세자가 묻힌 화산은 고산 윤선도가 효종의 능침으로 지목한 곳이어서 조선 최대의 음택풍수(좋은 무덤을 찾아 조상을 모시는 것) 길지로 알려진 곳이었다. 한편 반계 유형원은 수원의 읍치를 교통이 편리하고 넓고 평평한 곳으로 옮길 것을 주장했다. 정조가 유형원 선생의 주장을 받아들여 교통 편리한 지형에 새로운 수원을 앉힌 것이다. 이로써 음택풍수와 양택풍수(좋은 집터나 읍 터를 잡는 일)의 조화가 이루어졌다.

계획된 신도시

정조는 규장각을 설립하여 청나라의 백과전서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10,000여 권 중 5,000여 권을 수입하여 젊은 학자를 양성하는 한편 외국문물을 주체적으로 연구하게 했다. 이에 따라 청나라에 물밀 듯 들어온 서양의 새로운 문물과 과학문명, 서학 등의 사조가 조선에도 들어왔다. 북학파, 실학파 등이 등장하며 실용학문에도 관심이 고조되었다.

수원부지도

수원부지도

화성은 정약용의 기본설계서인 『성설』(『城說』)에 기초하여 수원의 중심부에 있는 143m의 팔달산 동쪽에 자리 잡았다. 동쪽과 서쪽은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고 북쪽과 남쪽은 평지에 성을 쌓아 올렸다. 축성은 김종서, 유성룡, 유형원 등의 성제 연구에 중국 성제의 장점을 택해 진행했다. 중국 성제의 장점은 벽돌과 공심돈 같은 방어시설물이 있다. 또 주목할 특징은 거중기, 녹로, 유형거, 각종 수레 등 새로운 과학기기를 사용한 점이다. 축성에 따라 문루, 도로, 수문, 교량, 연못, 식목(植木)사업 등 도시기반시설도 마련했다. 또한 축성에 참여한 인부들에게는 일한 만큼 돈을 지불하는 성과급제(成果給制)도 시행했다.

특히 신도시는 서쪽의 팔달산을 주산으로 관청인 화성행궁이 자리 잡고 동쪽은 자연 구릉을 그대로 이용했다. 그 가운데로 북에서 남으로 수원천이 가로질러 흐르는데 좌측은 용암, 우측은 거북산이 마주했다. 성의 가운데에 사거리를 만들고 종로라 했으며, 이 거리를 중심으로 상설시장들을 배치했다.

화성 신도시는 사도세자의 원침 보호에서 출발했지만 당시 사회․경제․정치적 제 조건 속에서 정조를 정점으로 관료․학자․기술자․백성들이 함께 만든 근대적 신도시이자 실학의 총체적 결정체이다. 화성은 광교산․수원천 같은 자연과 인공호수․성곽건축물들이 조화롭게 어울리게 계획되었다. 또한 조선시대 최대의 토목공사이며 성곽은 각기 다른 50여 개의 시설물로 이루어진 '성곽의 꽃'이다. 따라서 화성이야말로 자연과 인공의 조화, 자족적 신도시를 지향한 선조들의 뛰어난 지혜의 실현이다.

거중기

거중기

녹로

녹로

유형거(화성성역의궤)

유형거(화성성역의궤)

조선 제2의 도시

정조는 수원을 농업의 중심도시로 만들고자 했다. 그리하여 만석거와 축만제 등의 저수지를 만들고 이 물을 이용하여 새로운 방법으로 농사를 짓도록 했다. 물의 높이를 조절하는 농법이라든지 소를 나누어 주어 축력을 이용하는 농법 등의 실현으로 소득을 올리게 한 것이다.

또한 정조는 수원을 상업의 중심도시로 만들고자 했다. 당시 모자와 인삼 판매 독점권을 수원의 상인들에게 주려고 했다. 그 방법으로 전국의 부자 상인들을 모집하고 이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중국과의 무역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수원의 남과 북을 연결하는 도로에 기와집을 짓고 상설 점포를 내게 했다.

그러나 정조의 죽음으로 수원화성에 세웠던 뜻을 다 이룰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영화역을 새롭게 만들어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로 가는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지금의 1번 국도가 바로 이때 조성된 것이다.

정조는 1804년 아들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에 와서 살려고 했다. 수원을 자신이 꿈꾼 개혁의 도시로 만들고 아버지 사도세자를 왕으로 높이는 일도 추진코자 했다. 그뿐만 아니라 수원을 용인․진위․안산․시흥․과천을 포괄하는 수도 서울을 방위하는 경기 남부 지역의 군사요충지로 만들고자 했다. 그런 뜻과 꿈의 총체적 결정체로 쌓은 것이 바로 화성이라 하겠다.

출처 : 수원문화원 - 수원을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