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식 / 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

반계 유형원이 화성 축성을 처음 제안하다

반계수록

반계수록

수원화성은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누구의 제안으로 화성이 수원에 자리하고 오늘에 이르게 됐을까? 맨 처음 화성 축성을 제안했던 인물은 반계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다. 17세기의 유명 실학자인 반계는 저서 『반계수록(磻溪隨錄)』에서 옛 수원의 읍치(지금의 화성시 안녕리)를 큰 도시의 기상이 서린 현재 수원의 위치로 옮길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군사적으로도 중요하니 읍성을 쌓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화성 축성은 반계의 제안이 실천에 옮겨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채제공 초상화

채제공 초상화

정조시대에 들어 화성 축성을 제안한 사람은 부사직 강유(姜游) 등 여러 사람이었다. 그 중에도 화성 축성의 방법과 계략을 설명한 번암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축성방략(築城方略)」이 특히 주목된다. 이 글을 읽은 정조가 "늙은 재상의 글을 보고 마음이 감동되었다."라고 극찬한 것을 보면 번암의 저술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이 축성 이론을 정조에게 제출하다

정약용 「성설(城說)」

정약용 「성설(城說)」

정조는 본격적인 화성 축성에 앞서 공사 계획을 치밀하게 수립하고자 했다. 먼저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에게 축성 이론을 정리해서 제출하라고 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이장할 때 다산의 의견에 따라 배다리를 만들어 한강을 효과적으로 건넌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다산은 중국 성제의 장점과 조선 성제의 장점을 절충, 성에 관한 이론서라고 할 수 있는 「성설(城說)」을 지어 바쳤다. 이를 검토한 정조는 다시 옹성, 포루, 현안, 누조 등의 제도와 기중의 모든 이론을 빨리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궁궐에서 보관하던 책인 「기기도설(奇器圖說)」을 하사하여 참고하도록 했다. 얼마 후 다산은 「옹성도설(甕城圖說)」, 「포루도설(砲樓圖說)」, 「현안도설(懸眼圖說)」, 「누조도설(漏槽圖說)」, 「기중도설(起重圖說)」, 「총설(總說)」 등을 지어 정조의 요청에 충실히 응했다.

정조가 축성의 기본 지첨서를 친히 작성하다

정조는 다산의 저술을 참고하여 화성 축성 공사의 기본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어제성화주략(御製城華籌略)」을 친히 작성했다. 내용은 성의 전체 규모와 수치, 재료, 성 밖에 둘러 판 방어용 연못, 터 쌓기, 돌 뜨기, 길 닦기, 수레 만들기, 성을 쌓는 법 등의 8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다산이 지은 「성설」의 내용과 일치한다. 모든 준비를 마친 정조는 1794년 1월 7일 드디어 화성 축성을 시작했다. 반계 유형원이 화성 축성을 제안한 지 120년만의 일이었다.

정조시대의 모든 사람이 축성에 참여하다

김후 초상화

김후 초상화

화성 축성의 총책임은 총리대신 채제공이 맡아 중앙에서 공사를 총괄했다. 현장 공사의 실무 책임은 감동당상인 조심태(趙心泰 1740~1799)가 담당했다. 이어서 나머지 4개 직책에 28명의 상급관리자가 임명되었고, 17개 직책에 350명의 실무 관리자 및 실무자가 배치되었다.

이 중 별감동으로 활약한 김후(金火厚, 1720~1799)는 수원 출신으로 특히 주목되는 인물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이 수원에 자리 잡았으니 수원이 자신의 고향이 되었으며 수원사람은 고향사람 같다면서 각별한 친밀감을 드러냈다. 그래서인지 김후처럼 수원 출신 인물들을 더욱 신경 써서 등용한 사실이 각종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김후는 화성 축성에 공을 세운 후 여러 요직을 거쳐 황해병사까지 올랐다. 수원화성박물관에는 후손이 보관해오다 기증한 김후 초상화가 있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면 눈빛은 형형해 광채가 나는 듯하고 풍채는 무장답게 위풍당당하여 천년바위를 대하는 듯하다.

실학을 통한 개혁의 시범도시, 화성!

이외에도 관료학자인 태호 홍원섭(洪元燮, 1744~1807)은 축성과 관련해 한껏 문장력을 발휘했고 서예가 송하 조윤형(曹允亨, 1725~1799)과 기원 유한지(兪漢芝, 1760~?)는 현판 글씨를 멋들어지게 써서 주요 건물들을 아름답게 장식했다. 그리고 정우태(丁遇泰)를 포함한 여러 분야의 최고 기술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들은 담당 분야에서 그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화성을 더욱 빛나게 했다. 한편 화성 축성 후 정조는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초정 박제가(朴齊家, 1750~1805) 등 실학자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화성 주변에 국영시범농장을 설치했다. 선진적 영농기법을 적용하여 최대의 생산성을 올리는 실험도 행하게 한 것이다.
화성 축성, 이는 단순히 성곽만 쌓으려고 한 것이 아니다. 정조를 비롯한 각 분야의 전문가와 백성들이 참여하여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상하동락(上下同樂)할 수 있는 새로운 도시의 건설이다. 화성이 곧 개혁의 시범도시이자 실학 도시의 대역사였던 것이다.
출처 : 수원문화원 - 수원을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