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민 / 수원박물관 학예팀장

국난과 수원의 재발견

국난이 발생할 때마다 서울 남쪽의 수원은 재발견되었다.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 1537~1599) 장군의 독산성 전투는 삼남의 길목 수원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게 만들었다. 이후 독산성에 대한 대대적인 수축이 이루어지면서 수원은 군사적 요충지로 대우받았다. 이는 병자호란 당시 가장 큰 승리였던 김준룡(金俊龍, 1586~1642) 장군의 광교산 전투가 증명하는 바이기도 하다. 이에 수원은 전국적으로 활쏘기에 힘쓰는 상무전통에 빛나는 '무향(武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는 조선후기 정조 때 장용영 외영이 설치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현재 수원 지역에 유난히 별(장군)들이 많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 1950년 6.25전쟁은 다시 수원의 진가를 발견해낸다.

배양리 언덕에서 내려다본 수원비행장 일대

배양리 언덕에서 내려다본 수원비행장 일대

수원은 전통적으로 경기만 일대를 아우르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는 현재에도 해병대사령부와 해군 제2함대가 옛 수원 땅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증명되는 바다. 이에 더하여 일제강점기 수원에 비행장이 건설되면서 수원은 군사적으로 더욱 중요해졌다. 역사에서 가장 큰 변화를 몰고 오는 것 가운데 하나가 전쟁이다. 우리에게 커다란 역사적 변화를 초래한 전쟁을 꼽으라면 고려시대 몽골과의 전쟁과 조선시대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 그리고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던 6.25전쟁이다. 6.25전쟁은 아직까지 남북한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치며 삶을 구속하고 있다.

수원비행장의 존재감

6.25전쟁 때 수원의 중요성은 다시금 크게 부각되었다. 특히 전략적 요충지로서 수원비행장의 확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가장 가깝고 서부전선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비행장이었다. 수원비행장은 원래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기 위해서 1938년 만들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사용되었다. 일본의 패망 이후 수원비행장은 미군정의 관리에 들어갔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949년 한국 공군이 창설되었지만 여전히 미군의 수중에 있었다. 한국공군은 1950년 소규모 파견부대가 수원비행장에 주둔하고 있었다.

6.25전쟁 초기 수원비행장은 미대사관 사절단과 한국군 고문단의 이동을 위한 기지로 사용되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수원비행장은 유엔군 수송과 보급기지로서 김포 및 영일비행장과 함께 미 제5공군의 폭격기 발진 기지가 되어 유엔군 작전을 지원하는 중요한 비행기지였다. 송탄에 오산비행장이라는 이름으로 미군기지가 건설되기 전까지 수원비행장은 미군에게 가장 중요한 군사시설물 가운데 하나였다.

이에 1953년 10월 한국공군이 재배치되었고 관리권은 1955년 5월에 한국군에 이양되었다. 미 공군이 1957년 6월 철수하였으나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자 1968년에 미국은 기지를 재편하여 미군의 베트남전쟁 지원을 위한 전진기지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미군기지는 1972년 11월에 다시 한국공군에게 양도되었다가 1981년 미군의 주요 군사시설로 재편되었고 1992년 감축하여 현재에 이른다.

6.25전쟁과 수원

1950년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6월 25일 당일 오후 우체국 비상전화를 통해서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인민군은 개전 3일 만인 6월 28일 서울을 점령했다. 이에 서울로부터 피난민들과 전선에서 후퇴하는 군인들이 수원으로 내려오고, 특히 6월 28~29일 인민군 야크 전투기 편대가 수원비행장을 폭격하면서 전쟁은 구체적으로 실감되었다. 1950년 6월 29일 오후 미 극동사령관인 맥아더가 전용기를 타고 전쟁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곳도 수원비행장이었다. 이미 6월 27일 미 극동군사령부 전방지휘소, 6월 28일 육군본부와 주한미군사고문단이 수원 농사시험장에 자리 잡고 있었던 까닭이다. 6월 30일 대전으로 이동할 때까지 한․미 양군의 임시 지휘소는 수원이었다. 7월 5일 수원 남쪽 오산으로 넘어가는 죽미령 고개에서 한국전쟁에 투입된 최초의 미군과 인민군의 첫 전투가 펼쳐진 곳이기도 하다.

한편 1950년 9월 15일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에 따라 전황은 극적으로 반전되었다. 미군 해병대는 서울을 향해 진격하며 북진하였지만 미 보병 7사단은 수원을 향하여 남진하였다. 이는 수원비행장의 확보를 위한 것이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밀리는 1.4후퇴로 하여 서울과 수원을 내주었다가 다시 전선은 북상하여 현재의 휴전선 일대로 고정된 채 소규모의 전투가 지속되었다. 이에 서울과 한강 이북 농민들이 수원으로 몰려들었고, 더욱이 강원도 철원․평강․김화지역의 소위 '철의 삼각지'의 피난민들과 황해도 일대 피난민들이 수원에 정착하면서 수원의 인구는 일시적으로 급팽창하였다.

전쟁으로 부산에 머물던 경기도청이 수원으로 이전해 온 것은 1951년 4월이었다. 1953년 8월 서울로 복귀할 때까지 약 2년 5개월 동안 수원에 있었다. 수원시청을 비롯한 인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고, 피난민 구호사업 등을 시기적절하게 펼칠 수 있었다. 수원의 전후 복구사업이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상수도 시설의 확충과 시내 중심도로의 확․포장 및 수원시 청사가 신축되었다. 더욱이 경기도청이 마땅히 수원에 있어야 한다는 의식과 함께 1967년 경기도청이 수원으로 이전됨으로써 경기도의 수부도시로서 자리를 되찾았다. 수원은 전쟁을 통해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어왔던 한반도의 배꼽이다.

수원비행장(1952)

수원비행장(1952)

수원비행장

수원비행장

수원비행장의 맥아더(1950. 6. 29)

수원비행장의 맥아더(1950. 6. 29)

출처 : 수원문화원 - 수원을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