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우 / 경기문화재연구원 경기학연구실

강감찬의 귀주대첩, 3대첩의 하나로 남다

수원 광교공원에 있는 강감찬 장군 동상

수원 광교공원에 있는 강감찬 장군 동상

우리는 반만 년의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많은 외침을 겪었다. 그 중 적의 침입을 크게 물리친 3대첩으로 흔히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강감찬의 귀주대첩, 이순신의 한산도대첩을 꼽는다.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姜邯贊, 948~1031)은 오늘날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에서 태어났다. 『고려사』에는 강감찬의 탄생설화가 실려 있는데, 어떤 사신이 길을 가다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찾아가니 마침 그 집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가 강감찬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곳은 '별이 떨어진 터', 즉 낙성대(落星垈)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강감찬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35세 때 과거시험을 치러 장원급제하였다. 주요 활동 시기는 고려가 요나라와 대립하던 때였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고구려의 옛 땅을 찾고자 북진정책을 폈다. 따라서 송나라와 친교를 맺은 반면 발해를 멸망시키고 요나라를 세운 거란족은 철저히 배척하였다. 이러한 외교정책은 거란을 크게 자극하여 세 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입을 겪어야만 하였다.

제1차 침입 때는 서희(徐熙)가 담판으로 위기를 넘겼을 뿐 아니라 강동 6주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거란은 다시 강조(康兆)의 정변을 다스린다는 명분으로 침입해왔으나 별다른 충돌 없이 두 나라 간의 강화로 귀결됐다. 그 뒤 고려는 강동 6주를 돌려달라는 거란의 요구를 거절하며 국교마저 끊어버렸다. 이에 거란은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세 번째 고려 침공을 감행하였다.

당시 강감찬은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부원수 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거란군에 맞섰다. 흥화진에서 쇠가죽을 이용하여 냇물을 막았다가 일시에 흘려보내 적을 몰살시킨 것을 비롯하여 자주․신은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퇴각하는 거란군을 추격하여 귀주에서 크게 무찔러 적군 10만 명 중에 살아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이었다니 얼마나 큰 승리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현종 임금은 영파역까지 나가 개선하는 강감찬 장군을 맞았다. 비단으로 천막을 치고 축하연회를 베풀었는데, 금으로 만든 여덟 가지의 꽃을 장군의 머리에 꽂아주며 대승리를 치하했다고 한다. 이때 강감찬의 나이 72세였다.

40여 년 전의 애국선열 동상 건립 '붐'

1960년대 초반 광화문에서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길 양편에는 역사인물 40여 명의 조각상이 늘어서 있었다. 이는 서울시내 미술 전공 대학생들이 석고로 만든 것인데, 예술성이 떨어질 뿐 아니라 견고하지도 못했다. 실제로 1965년 7월 29일 한 신문기사에는 남대문로와 시청 광장분수 앞에 있던 안창호․유관순 석고상이 태풍에 쓰러진 사진이 실려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문화재위원회 등에서 논의한 결과 문화재로서 가치가 없는 석고상을 철거하고 새로 동상을 건립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어 1966년 8월에는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愛國先烈彫像建立委員會)'가 결성되었고, 당시 권력의 중심에 있던 김종필 공화당 의장이 총재를 맡았다. 이 위원회와 서울신문사가 주관하여 추진한 선열 동상 건립운동은 첫 작품인 이순신 장군 동상을 시작으로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이때 세워진 동상은 모두 15기인데, 대상인물과 건립 장소를 보면 이순신(충무로)․세종대왕(덕수궁)․사명대사(장충단공원)․이이(사직공원)․원효대사(효창공원), 김유신(시청 앞)․을지문덕(제2한강교)․유관순(남대문 뒤)․신사임당(사직공원)․정몽주(제2한강교)․정약용(남산도서관 앞)․이황(남산도서관 앞)․강감찬(수원 팔달산)․김대건(절두산)․윤봉길(대전체육관 앞) 등이다. 이들 동상 중 이순신(박정희)․세종대왕(김종필)․김유신(국회의원 김성곤) 등은 정치인이 헌납하였고, 나머지는 대기업의 대표가 비용을 부담하는 형식을 띠었다.

강감찬 장군 동상이 왜 팔달산 기슭에 세워졌을까?

성신사

성신사

강감찬 장군 동상은 조각가 김영중(金泳仲)이 만들고, 글은 역사학자 김상기(金庠基)가 지었으며 글씨는 이기우(李基雨)가 썼다. 그리고 동상 건립에 들어간 경비는 삼양식품 사장인 전중윤(全仲潤)이 부담했다. 총 높이는 10.2미터인데, 장군과 말의 동상만 4.5미터 규모이다. 1972년 5월4일 국무총리 김종필 등 정부요인과 수원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이 열렸다.

그렇다면 수원과 강감찬 장군은 어떤 역사적 관련성이 있을까. 혹시 '외적이 수원에 침입하였을 때 이들을 무찔러 수원을 지켜낸 장군'이라고 보진 않을까. 그런데 수원과 강감찬 사이에는 특별한 관련성이 발견되지 않아 왜 팔달산에 장군의 동상이 세워졌는지를 설명할 길이 없다. 결국 1960~1970년대 위대한 인물 동상을 세워 업적과 애국심을 본받자는 운동이 벌어졌을 때 수원시와 강감찬이 '아무 연고도 없이 맺어졌을 뿐'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게다가 동상이 있는 팔달산 동쪽 기슭은 본래 성신사(城神祠) 터로 화성(華城)을 지키는 신(神)을 모시는 사당이 일제시기에 훼손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결국 강감찬 장군의 동상을 철거하고 성신사를 복원하자는 시민의 요구가 받아들여져 2007년 12월 28일 동상은 광교공원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동상이 완전히 수원을 떠나지 않은 이상 앞으로도 장군과 수원을 연상케 한다는 논란은 그치지 않을 듯하다.

출처 : 수원문화원 - 수원을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