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호 / 수원화성박물관장

딸기밭은 어떻게 생겼나

푸른지대 딸기밭은 1970~80년대 수원의 명소였다. 푸른지대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의 서쪽인 후문 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농대의 수려한 풍경과 어울리게 지었는지 푸른지대는 호기심과 설렘을 불러일으키는 이름이었다.

서둔동 딸기밭

서둔동 딸기밭

이곳에 처음 딸기밭을 조성한 사람은 박철준(朴喆俊)이다. 그는 서울농대 교수의 지도를 받아 대학1호인 신품종 딸기를 1955년부터 재배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딸기는 크기가 작은 재래종뿐이었는데 여기서 생산되는 딸기는 알이 굵고 껍질이 얇으며, 다수확 우량품종으로서 청정재배를 해서 깨끗하고 신선했다. 해마다 딸기 재배면적은 늘어나 푸른지대에 3만 평, 그 주변을 합치면 7만에 달했다.

푸른 지대 주인인 박철준 사장은 자신의 땅 1,005평을 자행회에 희사하기도 하고 1973년에는 푸른지대에 딸기 수출 가공공장을 설치키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실현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당시 이곳을 찾는 주말 인파는 5만을 헤아렸는데 딸기에 해충이 있는지 품질 검사를 철저히 했다. 거북산당은 수원화성을 축조하기 이전인 1790년경에 세웠다고 했는데 처음에는 아마도 새 도시 수원의 구심점이었다가 시장이 활성화 되면서 상인들의 재물 복을 빌어주는 신당으로 자리를 잡은 것 같다.

푸른지대의 탄생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다. 주위에 우리나라 농업 1번지의 핵심 기관인 농촌진흥청이 있어 새로운 품종을 개발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주위에 농촌진흥청과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의 울창한 연습림과 여기산과 같은 녹지가 있었던 것이다. 서울서 기차를 타고 수원역에 도착하기 전에 만나게 되는 풍경 또한 무시 못 할 요인 중의 하나이다.

수원역에 도착한다는 방송이 나오기 시작한다. 오른쪽으로 정조가 과학 영농을 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건설한 서호와 그 뒤에 어머니 가슴같이 부드러운 산세를 자랑하는 여기산이 누워있다. 저수지 수면을 경계로 대칭으로 여기산이 물속에 잠겨있다. 둑에는 그림 같은 소나무와 그 앞에 펼쳐진 규격화된 시험 재배 논의 출렁이는 벼. 이러한 풍경이 수원의 첫인상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진한 연애를 위한 꼼수

당시는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어 박정희 1인 독재가 자리 잡고 정치적 폭압이 가중되는 시기였다. 장발족을 단속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고 미니스커트의 길이도 재면서 정부에서 간섭하는 시기였다. 한편으로는 향락과 소비를 부추겨 젊은이들의 관심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는 정책도 아울러 펼쳐졌다.

당시 선택받은 대학생들은 부모님들의 주머니를 털어 짝짝이 그룹으로 수원 딸기밭으로 몰려들었다. 선배들의 추억에 의하면 푸른 지대 남쪽 옆으로 목장을 지나면 서울 농생대 연습림이 넓게 펼쳐지는 데 당시 젊은이들의 데이트 장소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다. 푸른지대 안 전원주택과 정원들은 눈을 즐겁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서울에서 내려온 선남선녀들은 더 진한 연애를 꿈꾸며 고속버스 막차 시간을 넘기고자 꼼수를 부렸다.

서울행 고속버스 막차는 9시였던 것 같다. 9시를 넘기면 서울로 가는 방법이 막막해지는 것이다. 택시를 타든지 수원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새벽차를 타든지 할 수밖에 없었다. 중동사거리 지나 옛 수원극장 옆에 버스터미널이 있었는데 7시 정도에 와도 버스표는 전부 매진되어 서울로 가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터미널은 서울로 가기 위한 인파로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길로 흥하고 길로 쇠하다

1970년대 푸른지대 앞에서 딸기크림을 사먹는 나들이 나온 여학생들

1970년대 푸른지대 앞에서 딸기크림을
사먹는 나들이 나온 여학생들

서울에서 수원으로 오는 방법은 기차도 있었지만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더욱 편리해졌다. 1970년에는 장항선 특급열차가 수원에 정차하게 되었고 경부고속도로가 개통이 되면서 1972년부터 유신고속에서 운행하는 고속버스가 통행을 시작한 것이다.

고속버스는 수원의 수원극장 옆 정류장과 서울의 쌍용빌딩 옆 을지로 3가를 왕복하였다. 한편 1973년부터 서울서 수원까지 41.5km에 달하는 전철이 개통되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가 편리해졌다. 당시 학생들은 장항선을 타고 텐트와 버너 그리고 쌀을 비롯한 먹을거리를 준비하여 주로 서해안의 해수욕장을 찾아 무전여행을 할 때였다.

이와 같이 서울을 오가는 대중교통의 확장이야말로 딸기밭이 흥성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푸른지대만 아니라 노송지대를 중심으로 또 하나의 큰 딸기밭이 형성되어 수원 딸기는 명성을 드높이고 있었다.

그러나 1975년에는 영동고속도로가 강릉까지 확대 준공되었다. 또한 수원 주위에 민속촌이 1974년에 완공되고 에버랜드(당시 이름은 용인자연농원)가 1976년부터 문을 열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다 자가용 보급이 확대되면서 사람들은 더 멀리 새로운 놀이터를 찾아 떠나기 시작했다. 한편 밀려든 인파를 수용해내지 못한 점도 딸기가 쇠락의 길로 접어든 이유일 듯하다.

더구나 차떼기로 타지의 딸기를 수원 딸기로 둔갑시킨 일 등이 결정적으로 수원 딸기를 역사의 뒤안길로 내몬 이유가 될 것이다. 제주도 꿀이 제주도 산이 아니듯 말이다. 이제 딸기밭의 명성은 한갓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결국은 유행을 타고 유행을 쫒다보면 새로운 사조가 우리를 덮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현상이다.

출처 : 수원문화원 - 수원을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