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득 / 정조대왕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유수제도는 역사가 길다. 한(漢)나라 고조(高祖)와 당(唐)나라 태종(太宗), 현종(玄宗) 등의 황제가 수도를 비울 때 유수를 두어 수도를 지키게 하거나 옛 도읍지에 유수를 두어 행정을 맡긴 데서 비롯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995년 서경(西京, 평양)에 처음 유수관을 설치한데 이어서 987년 동경(東京, 경주), 1067년 남경(南京, 양주)에 유수를 설치하였다. 유수관이 설치된 지방은 전조(前朝)의 도읍(都邑)으로서 그 유임을 우대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조선시대의 유수부 제도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도읍이었던 개성에 유후사(留後司)제도를 시행하다가 1438년에 유수부로 명칭을 변경하고, 1443년 유수의 품질(品秩)을 종2품으로 결정했다. 1627년 정묘호란으로 정국의 긴장감이 고조되자 강화에 유수부를 설치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1683년 남한산성 강화와 함께 광주부도 유수부가 되었다가 1690년 다시 광주부가 되었다. 그 후 1750년 균역법 시행과 함께 유수부가 되었다가 1759년 다시 혁파되었는데, 1795년에는 다시 유수부로 승격되는 등 설치와 혁파를 거듭했다. 1793년에는 수원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켜 서울 주위에 4개의 유수부(수원, 개성, 강화, 광주)가 호위하는 체제가 완성되기에 이른다.

여기서 개성과 강화는 고려의 수도였으며, 광주는 백제 온조왕의 사당을 모신 곳이므로 전조의 수도를 우대한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수원에는 유수부를 설치할 만한 근거가 없었다. 그래서 다산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수원의 화성유수부 승격과 의미

19세기 중반 수원 유수가 중앙행정기관인 비변사에 보고한 내용을 담은 책

19세기 중반 수원 유수가
중앙행정기관인 비변사에
보고한 내용을 담은 책

그런데 정조는 수원에 유수부를 설치하고자 했다. 그것은 현륭원을 수원으로 옮긴 후 사도세자의 음덕으로 1790년 원자(元子)가 태어났음을 강조한 데서 비롯되었다. 왕실의 기반을 든든히 한 사도세자의 무덤이 위치한 수원이 새로운 풍패(豊沛)의 땅이 된 것이다.

원자가 잘 성장하자 정조는 왕위에서 물러난 후, 새로 즉위한 국왕에게 사도세자의 국왕추숭을 요청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상왕이 된 정조가 내려와 살 곳으로 수원을 선택한 것이다. 따라서 수원은 이전까지와 다른 차원의 관리가 필요해졌다. 정조가 그 계획을 위해 수원에 유수를 두어 만반의 준비를 했던 것이라 하겠다.

1793년에는 수원의 이름 자체를 화성으로 개명하면서 유수영을 설치했다. 그리고 1년 뒤에는 새로운 도시 건설인 읍성으로서의 화성 성역이 진행되었다. 화성 성역은 '현륭원과 화성행궁의 보호'라는 명분을 걸고 정조의 각별한 관심 아래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정조는 초대유수 채제공과 훈련대장 조심태가 이 중요한 역사(役事)를 주관하도록 했다. 더욱이 정조는 직접 팔달산에 올라 축성의 대략을 지시하기도 했는데, 자신이 내려와 살 곳을 직접 마련한다는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유수부의 역할과 위상

유수부는 유수가 행정을 총괄하는 관아, 또는 그 관할 행정구역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유수부의 책임자는 유수이고, 유수관 또는 유수사로 일컫기도 하며, 군무(軍務)를 함께 담당했기 때문에 유수영 또는 유영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한 유수부는 지방행정조직이 아닌 경관직(京官職)으로 운영되었으며, 동시에 군사조직의 성격을 갖고 있다. 수원에 장용영(1802년 이후 총리영)을 설치했듯이 개성에 관리영, 강화에 진무영, 광주에 수어청을 설치하고 각 유수들이 군영의 대장을 겸임하여 휘하의 군대를 통솔케 했던 것이다.

또한 각 유수부는 각 군영의 주둔을 위한 대규모 성곽이 축조되어 있었다. 개성은 1675년에 북쪽 천마산․성거산 일대에 대흥산성을 축성했으며, 강화부는 그 자체가 조선 최대의 보장처(堡障處)임에도 숙종대에 정족산성과 해안의 진보(鎭堡)를 수축했고, 영조 때에는 해안가에 외성까지 쌓았다. 광주부는 1626년에 읍치를 남한산성으로 옮기고 병자호란을 겪은 후에 유수부로 승격되었다가 치폐를 거듭했으나 꾸준히 산성 방어시설을 강화했다.

따라서 수원이 유수부로 승격되고 군영이 설치되었으므로 화성이 건설되는 것은 타 유수부의 전례에 비춰 필연적인 일이었다. 이후 화성유수부는 한양 남쪽을 담당하는 주요 도시로 성장하며 근대에 들어서는 경기도의 수부도시가 된다.

출처 : 수원문화원 - 수원을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