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 한국병학연구소

장용영이 창설되기까지

장용영 서울 본영도형

장용영 서울 본영도형

정조는 세손시절부터 여러 차례 목숨을 잃을 뻔했다. 1776년 임금으로 즉위했으나 자객이 궁궐에 침입하는 놀라운 사건까지 겪는다. 이를 계기로 정조는 국왕 호위를 전담하는 숙위소를 설치하고 심복 홍국영을 숙위대장에 임명한다.

홍국영은 즉위 초의 불안한 정국 안정에 큰 역할을 했으나 지나친 욕심을 부리다 결국 숙청되고 숙위소도 폐지되었다. 정조는 자객의 침입과 반역사건을 겪으며 친위 부대를 창설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정조가 즉위했을 때 서울에는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어영청, 총융청 다섯 개의 부대가 있었다. 군사 행정을 총괄하는 병조판서는 직접 금위영을 지휘했다. 그러나 나머지 4부대는 병조판서의 지휘를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노론과 소론 등 정치세력을 은밀히 지원하기도 했다. 정조는 즉위 초에 선포한 '경장대고'를 통해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군사제도를 개혁해 나갈 계획을 밝힌다.

정조는 1782년에 훈련도감의 무예출신 및 무예별감의 장교를 지낸 무사 30명을 뽑아 창경궁 명정전에 숙직하며 자신을 호위하도록 했다. 이들은 무예별감 가운데 무과에 합격한 무사들이기 때문에 신분도 분명하고 무예 실력도 뛰어난 최정예 병력이다.

1785년 7월 2일에는 장용위를 창설한다. 기존의 30명에 20명을 더해 총 50명의 병력이다. 이때 장용위는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후 장용위의 병력과 재정을 꾸준히 더 늘여 1787년에는 장용청으로 승격시키고, 마침내 1788년에는 독립된 군영으로 장용영을 출범시켰다.

1789년 가을, 수원에 장용영이 배치되다

1789년 가을,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산으로 옮기면서 수원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겼다. 이때 장용영 3초(약 360명)를 파견하여 현륭원과 수원 행궁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때 정조는 장용영에 명을 내려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라는 어명을 내린다. 당시 합동군사훈련을 벌인 뒤 훈련에 참가한 무사를 대상으로 무예시험을 자주 보았다. 그런데 군영마다 무예의 동작과 자세가 조금씩 차이가 나는 것을 발견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여 무예의 표준을 마련하도록 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숨은 뜻도 들어 있다.

장용영 창설 이전에는 훈련도감이 모든 군영의 기준이었다. 예컨대 무예서 편찬도 훈련도감이 주관했다. 『무예제보』를 비롯하여 『무예제보번역속집』과 『무예신보』도 훈련도감에서 펴낸 것이다. 정조는 이런 관례를 깨고 장용영이 병서 편찬을 담당하도록 했다. 정조의 명으로 장용영에서 펴낸『병학지남』과 『무예도보통지』는 조선후기의 병서를 대표하는 책이다.

정조는 장용영을 확대하여 진위, 양성, 용인, 광주, 양주, 고양 등지에 주둔시키고 서울과 수원의 외각 경비를 담당하는 임무도 맡겼다. 1793년에는 한강 이북의 군사들은 서울에 있는 내영에, 한강 이남의 출신들은 수원 화성의 외영에 소속시켰다. 이듬해인 1794년 정월, 정조는 팔달산에 올라 화성을 축성하도록 지시한다. 물론 장용영 군사들이 화성 성역에 주역으로 참여했다.

장용영 현판 탁본

장용영 현판 탁본

정조는 1793년 1월에 수원부를 유수부로 승격시키고, 수원 유수에게 장용외사의 직무를 겸임하도록 했다. 이때부터 수원을 외영, 서울 본영을 내영이라 불렀다. 수원에 장용영 외영을 설치하면서 수원은 서울 다음의 군사도시가 되었다. 정조는 특히 마병을 육성하는데 힘을 기울였는데 1793년 장용영 외영에 기병부대인 친군위를 설치했다. 물론 친군위는 마상기예를 시험 보아 선발했다.

1798년에 정조는 장용영 외영을 조선 초기의 중앙군제인 오위로 바꿉니다. 이것은 정조가 펼친 군사개혁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외영을 오위로 개편하면서 '장락대'라 불렀습니다. 장락대에는 신풍위 장안위 팔달위 창룡위 화서위의 다섯 개 위가 소속되어 있는데 병력은 13,726명이나 됩니다.

장용영은 선진 농업기술을 실험하고 보급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대유둔, 서둔 같은 국영농장인 둔전과 축만제, 만석거 같은 저수지도 장용영 군사들이 만든 것이다. 외영에서 경작하였던 둔전을 통해 새로운 농기계를 제작하고, 성능을 실험한 뒤 전국의 둔전에 보급했다. 이를 통해 장용영의 경비를 스스로 마련했던 것이다. 화성은 자급자족의 풍족한 도시로 우뚝 서게 되었다. 현재 수원에 농촌진흥청을 비롯한 여러 가지 농업기관이 있는 것도 200년 전 선진 농법을 실험한 장용영 외영의 둔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재위 24년 동안 조선의 경제를 충실히 하고 강한 군대를 육성하였으며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규장각은 물론 장용영을 통해서도 낡은 조선을 개혁하고 부국강병을 이룩하려 했던 것이다.

장용영은 정조가 승하하고 2년이 지난 1802년에 해체되고 말았다.

정권을 장악한 벽파 세력들은 5,000명이 주둔하던 화성 장용영 병력을 10분의 1로 줄였다. 정조의 개혁정책을 반대했던 벽파 기득권 세력들이 장용영을 해체하고 화성의 위상을 축소시켰던 것이다.
장용영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하지만 수원화성에는 오늘도 그 기상을 상징하는 깃발들이 씩씩하게 나부끼고 있다.

출처 : 수원문화원 - 수원을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