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봉건 사회의 모순 속에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다. 농민들은 봉건제와 외세침략에 반대하며 항쟁하였다. 이후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거족적 민족항쟁인 의병투쟁이 일어났다. 수원의 의병투쟁은 홍원식, 홍일초 등의 의병부대와 남양만 일대의 수적세력과 농민군, 활빈당의 적극적 항쟁으로 나타났다. 일제의 식민지배에 수원지역의 주민들은 끝까지 저항하였다. 1910년대 민족해방운동의 절정인 3.1운동은 조직적이면서 공격적 양상으로 나타났으며, 3.1운동 이후 젊은 청년유지들을 중심으로 계몽운동도 활발하였다. 또한 젊은 지식청년들의 청년운동과 사회운동도 확대되었다. 그리고 지역 주민 대부분이 소작농이었던 현실 속에 생존권 사수를 위한 소작쟁의 등 농민과 노동자들의 투쟁도 지속되었다.
서울 종로 만세 운동
<서울 종로의 만세운동>

구국민단

이종상, 임순남, 최문순, 이선경, 박선태 등의 젊은 학생들이 일본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위하여 1920년 6월 20일 ‘구국민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박선태는 회장, 이득수는 부회장이 되고, 수원에 거주하고 있던 김석호, 김노적, 윤귀섭, 김병갑, 이희경, 신용준 등이 동지가 되었다. 이들은 ‘일한합병에 반대하여 조선을 일본제국 통치하에서 이탈케 하여 독립국가를 조직할 것’과 ‘독립운동을 하다가 입감되어 있는 사람의 유족을 구조할 것’을 목표로 내세웠다.

신간회 수원지회

신간회는 민족통일전선 운동 단체로 창립되었다. 신간회 수원지회도 수원지역의 유지층과 종교계 인사들, 사회주의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1927년 10월 17일 조직되었다. 신간회 수원지회는 대중운동의 지원과, 지역주민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이익증진을 위한 활동 등을 수행하였다. 더구나 지역사회의 현안과 민족문제를 해결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일제의 끊임없는 탄압 속에 1931년 산간회 해소안이 가결되면서 해체되었다.

수원청년동맹

사회주의 청년단체인 수원청년동맹은 성호면의 공석정과 양감면의 박승극이 주도하여 1929년 6월 9일 결성되었다. 수원청년동맹은 오산청년동맹과 반도청년회의 연합으로 탄생했다. 집행위원장에 박승극이 선출되었고 조직이 편성되었다. 수원청년동맹은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위해 청년 대중의 의식적 교양과 훈련의 철저를 기하면서 1934년 해산되기까지 성호지부, 수원지부, 양감지부를 운영했다.

소직쟁이

1920년대 수원지역의 소작쟁의는 주로 일본인 대지주들의 농장에서 나타났다. 농감들의 횡포와 소작권 이동, 소작료의 인상 등이 농민들의 생존권을 위협했다. 소작농들은 연대하여 적극적으로 투쟁하였다. 또한 일제의 지주중심의 농업정책은 1930년대에도 지속적으로 계급적 차별과 모순을 격화시켜 끊임없는 소작농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수원고농사건

1930년대에도 수원고등농림학교의 비밀결사운동은 계속되었다. 학생들은 졸업생 김종수를 중심으로 수원지역에서 상록수 운동과 독서회 활동을 전개하며, 전국 각지의 수원고등농림학교 졸업생들과 연계하여 농민 중심의 문맹퇴치운동과 항일의식 고취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1935년 7월 졸업생 이용필이 김천고보맹휴사건과 관련하여 체포된 뒤 비밀결사가 탄로나 김종수, 이용필, 최홍기, 김광태, 김준강, 김재곤, 유재환 등 7명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에도  1939년 다시 졸업생 김중면이 함남 갑산농학교에서 독서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임봉호, 박도병 등과 체포되었다. 수원고등농림학교의 비밀결사운동은 우리말과 국사와 전통을 공부하여 항일독립정신을 함양하고 민족문화를 계승할 목적으로 독서회(한글연구회)를 조직하는 등 활발한 독립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이들은 농민봉기를 전개하여 민족의 자유와 정치적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였다.

수원소년동맹 격문사건

수원지역의 청년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 수원청년동맹 산하의 수원소년동맹의 맹원이었던 홍종근(洪鍾根, 당시 18세)과 김장성(金長成, 당시 18세)이 일으킨 사건이다. 이들은 1930년 10월 12일이 화성학원의 운동회가 개최되어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을 예상하고, 종이에 ‘무산대중(無産大衆)에게 격(檄)함, 노동자․농민은 일치단결하자, 전민족적 대중투쟁을 권기(捲起)하자, 자본가의 착취에 대해 최후까지 반항하자, 조선총독부 폭압정치를 타도하자, 무산자․노동자․농민 만세’ 등의 내용을 쓴 16매의 문서를 만들어 수원면 북수리에서 수원면 읍내에 이르는 10여 곳의 장소에 붙여 독립의 의지를 불태웠다.

수원예술호연구락부 항일문서 사건

1939년 10월에는 사회주의 청년 최용범, 차준철, 김길준, 맹승재, 강성문, 홍순철, 용헌식 등이 ‘수원예술호연구락부(水原藝術互硏俱樂部)’를 결성하였다. 이들 청년들은  ‘총독정치는 내선일체를 통치의 근본방침이라고 표방하지만 단순한 구실일 뿐 결국 식민지적 기만정책에 불과하며, 현재 일본인의 차별적 냉대를 물리치고 조선인에게 진정한 행복을 얻게 하기 위해 조선에서 일본제국의 속박으로부터 이탈하여 독립하고, 그 위에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는 공산사회를 실현하지 않으면 안된다’며 민족차별과 조국독립, 공산주의 사회제도의 실현을 위해 활동하다 결국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나석균 낙서사건

1941년 4월 29일 나홍석의 아들이자 여류 문인 나혜석의 조카였던 나석균이 낙서사건을 일으켰다. 팔달산 정상의 등산로에 1894년 7월 청일전쟁 당시 수원성내에서 자결한 일본군 대대장 고시마사츠나(古志正綱) 대대장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과 장안문 계단위의 남문 등에 크레용으로 ‘미나미(南次郞)를 주살하라, 황국신민이란 무엇인가? 죽음으로 미나미를 타살하자. 우리들은 대한국민이다. 대한만세 타도일본 대한만세 독립청년군. 우리들은 대한국민은 일치단결하여 대한독립을 이루자.’ 등의 내용을 적어 독립의 의지를 불태우며 일제의 식민지배와 황국신민화 정책을 규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