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바로가기

수원관광

수원의 국가유산

  • 경국대전 권 4~6
  • 경국대전 권 4~6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조선의 통치체제의 대강을 규정한 최고의 성문법전이다. 세조가 즉위 후 1455년(세조 즉위년)에 최항(崔恒)·노사신(盧思愼)·서거정(徐居正) 등에게 편찬할 것을 명하자 몇 차례의 수정과 증보를 거쳐, 성종 16년인 을사년(1485년)에 “을사대전(乙巳大典)”이 완성되었다. 『경국대전』은 완성 이후 조선 말기까지 조선의 가장 기본이 된 법전으로서 조문의 수정 없이 적용되었다. 따라서 조선 전기의 법제사・제도사의 연구에 있어 핵심이 되는 매우 귀중한 문헌이며, 서지...

  • 무예제보
  • 무예제보

    『무예제보』는 문인 관료 한교(韓嶠,1556~1627)가 선조의 명을 받고 1598년(선조 31)에 편찬, 간행한 무예 기술 지침서이다. 이 책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무예서 중 가장 먼저 편찬된 것으로 국내 유일본이다. 선조의 명을 받은 한교는 명나라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바탕으로 대봉(大棒), 등패(藤牌), 낭선(筤筅), 장창(長鎗), 당파(钂鈀), 장도(長刀)의 여섯 병기를 사용하는 무예에 대해 한문으로 설명하고 한글 번역문인 언해(諺解)를 붙였다. 한문과 언해의 배치 방식은 한문으로 된 제법(製法)과 그 언...

  • 정약용 행초 다산사경첩
  • 정약용 행초 다산사경첩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전남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1809년(순조9)에 쓴 <다산사경>과 1818년(순조18)에 쓴 <순암호설>, 유배가 끝난 후인 1823년(순조23)에 쓴 <여다산제생문답>과 강진 유배 초기로 추정되는 오언시 등을 수록한 서첩이다. 서체는 대부분 행서이고, 일부는 초서로 되어 있다. <다산사경(茶山四景)>은 1801년 강진으로 유배 간 정약용이 1808년부터 사용하던 거처인 다산초당 주변에 있던 4가지 사물인 다조(茶竈, 차를 끓이는 부엌으로 초당 앞마당...

  • 수원향교 대성전
  • 수원향교 대성전

    수원향교는 18세기 말 수원의 읍치 이전에 따라 현 위치로 옮겨 다시 지어진 독특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신읍은 정조가 주도한 화성 축성과 함께 화성유수부로 승격되었는데, 유수부 위상에 맞게 향교 역시 1795년 재정비되었다. 수원향교 대성전은 을묘년 원행 시 방문한 정조의 어명을 받아 20칸 규모로 다시 지어졌는데, 그 내력은 <화성성역의궤> 등의 문헌에 자세히 전해지고 있다. 대성전의 규모는 서울 문묘, 나주향교, 상주향교, 제주향교, 대정향교와 함께 현존하는 조선시대 항교 대성전 중에서 손꼽히는 큰 규모를 가지며, ...

  • 채제공 초상 일괄-흑단령포본
  • 채제공 초상 일괄-흑단령포본

    오사모(烏紗帽: 관복을 입을 때 쓰는, 외올실로 만든 검은 빛깔의 벼슬아치 모자)에 흑단령을 입고 가볍게 공수(拱手: 두손을 어긋매껴 마주잡는 일) 자세를 한 번암 채제공 72세 초상이다. 흑단령은 문관의 정복으로 가슴에 쌍학 흉배가 수놓아져 있다. 쌍학 흉배는 당상관 이상의 고위 문관의 복식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채제공은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 초대 수원유수와 수원화성 축성 총리대신 등을 역임하였으며, 정조대왕의 명재상이었다. 이 초상의 얼굴 모습으로 볼 때 시복본 초상(보물)과 흡사한데, 안면과 옷주름의 입체감 표현...

  • 채제공 초상 일괄-금관조복본
  • 채제공 초상 일괄-금관조복본

    번암 채제공(1720~1799) 초상으로 금관을 쓰고 붉은색 조복(朝服: 관원이 조정에 나가 하례할 때 입었던예복) 차림으로 의자에 앉은 채제공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초상과 함께 보관했던 함도 함께 전한다. 금관조복본 초상의 왼편에는 채제공의 문인인 이정운(李鼎運, 1743~?)이쓴 채제공의 자찬문이 쓰여져 있다. 서양화법을 따른 명암법을 적절히 구사하여 얼굴을 사실적으로 묘사했으며, 장식적인 금관조복을 금박, 선명한 채색, 명암법 등으로 화려하게 표현했다. 사실성과 장식성을 어우러지게 하여 조선시대 초상화의 뛰어난 수준을 잘 보...

  • 수원 화령전 운한각, 복도각, 이안청
  • 수원 화령전 운한각, 복도각, 이안청

    화령전은 정조의 어진, 즉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지내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왕의 어진을 모신 사당을 전국 여러 곳에 두었다. 지금은 전주 경기전과 개성 목청전, 창덕궁 선원전, 수원 화령전만이 남아 있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순조 1년(1801), 화성행궁 옆에 화령전을 짓고 현륭원 재실과 창덕궁 주합루에 모셔져 있던 어진을 옮겨와서 봉안했다. 화령전은 정전인 운한각을 중심으로 이안청, 복도각, 재실, 전사청과 향대청 등을 갖추고 내외삼문까지 구비했다. 당대 최고급 기술자들이 참여하여 약 2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완성했다...

  •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
  •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

    이 비는 창성사에서 입적한 진각국사 천희(千熙, 1307~1382)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것으로 고려 우왕 12년(1386)에 만들어졌다. 천희는 13살의 나이에 불교계에 들어섰다. 57세라는 늦은 나이에 중국 유학을 결심하여 1364년부터 2년간 원나라에서 선종을 공부하고 돌아왔다. 귀국 후 국사(國師)에 봉해져 영주 부석사(浮石寺)를 중수하는 등 고려 말에 활약하였다. 본래 탑비는 광교산 기슭의 창성사 폐사지에 있었으나, 1965년 6월 9일 수원화성의 방화수류정 옆으로 이전하고 보호각을 설치하였다. 비(높이 215cm)의 형...

  • 수원 팔달문
  • 수원 팔달문

    팔달문(八達門)은 화성의 4대문 중 남문으로, 정조대왕과 당대 국왕들의 현륭원 참배 시 이용되었던 문이다.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15일에 완공하였다. 팔달문은 모든 곳으로 통한다는 '사통팔달(四通八達)'에서 비롯한 이름으로, 축성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성문의 바깥에는 반달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는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성문의 오른쪽 석벽에는 팔달문 공사 관계자...

  • 수원 화서문
  • 수원 화서문

    화서문(華西門)은 화성의 4대문 중 서쪽 대문으로, 화성 서쪽의 남양만을 비롯하여 서해안 방면으로 연결되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1795년(정조 19) 7월 21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정조 20) 1월 8일 마쳤다.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403호로 지정되었다.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였던 채제공(蔡濟恭)이 썼으며, 옹성 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는 성문공사를 담당하였던 사람과 책임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공공누리 상위 저작물은 수원시 홈페이지 저작권청책에 따라 담당부서와 협의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 담당부서 : 관광과 | 문의 : 031-228-3034
  • 만족도 조사 : 현재 열람하신 페이지의 정보에 만족하십니까?

평가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