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의 자랑할 만한 역사적 인물은 많으나 대표적 인물 몇 분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이 고(李 皐) (본관 : 여주(驪州), 1341 - 1420)
- 김준룡(金俊龍) (본관 : 원주(原州), 1586 - 1642)
- 최루백 - 하늘이 내린 효자
- 수원 농업을 개척한 실학자, 우하영 (1741~1812)
- 시대를 앞서 간 여인, 나혜석 (1896~1947)
- 김세환(金世煥) (교육자·독립운동가, 1889~1945)
- 김향화(金香花) (기생 ․ 독립유공자, 1897~?)
- 이선경(李善卿) (독립유공자, 1902~1921)
- 임면수(林勉洙)(독립유공자, 1874. 6. 13 ~ 1930. 11. 29)
- 김장성(金長星)(독립유공자, 1913. 2. 7 ~ 1932. 3. 9)
- 박선태(朴善泰)(독립유공자, 1901. ~ 1938.)
- 홍종철(洪鐘哲)(이명 홍순철, 독립유공자, 1920. 3. 26 ~ 1989. 7. 22)
이 고(李 皐) (본관 : 여주(驪州), 1341 - 1420)
이고 선생은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자 관직제수를 거부하고 각처에 은둔한 고려 충신 3학사 가운데 한 분으로, 수원에 은거한 절개 있는 선비로 알려져 있다. 이고 선생의 행적을 『조선왕조실록』에서 살펴보면 새 왕조 조선에서 대간의 직책으로 활동하다가 민생의 안정을 위해 군적 정리를 뒤로 미루자는 상소로 파직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태조 9년(1409) 공안부윤으로 임명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수원에 은거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준룡(金俊龍) (본관 : 원주(原州), 1586 ― 1642)
김준룡 장군은 병자호란 당시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재임하면서 관할 군사들을 이끌고 수원 광교산에 진을 치고, 광교산 전투에서 청 태종의 사위인 '백양고라'와 장수 3명을 포함 하여 수많은 적병을 살해하고 대승리를 거두었다. 치열한 싸움으로 병사들이 흘린 피가 골짜기를 뒤덮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광교산에는 오랑캐가 항복한 골짜기라는 뜻의 '호항골(胡降谷)'이라는 지명이 전해져 올 정도이다. 이러한 승전보는 1637년(인조 15) 1월 5일 실록자료에 나오는데 이는 당시 남한산성에서 항전하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위안이었다고 전한다.
최루백 - 하늘이 내린 효자
고려 의종 때의 효자로, 당시 수원의 향리 최상저의 아들로 태어났다. 효성이 지극하여 수원뿐만 아니라 온 나라에 소문이 자자했으며, 한림학사 벼슬에까지 오른 분이다. 그의 효행은 너무도 유명하여 '오륜행실도'(☆) 등 여러 책에 기록이 되어 있으며, 나라에서는 정문(☆)을 내리기까지 하였다.
수원 농업을 개척한 실학자, 우하영 (1741~1812)
우하영 선생은 우리나라 농업의 중심지 수원을 빛낸 농학자이자 실학자이다. 1741년에 수원 지방(지금의 화성군 매송면 어천리)에서 태어나 1812년 72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우하영 선생은 평생 벼슬을 한 적은 없으나,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아 '농가총람'과 '관수만록', '천일록' 등 농업과 관련된 훌륭한 책을 많이 쓰신 분이다. '농가총람'은 선생께서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깨달은 것들을 내용으로 한 농업에 관한 책이며, '관수만록'은 정조 대왕께서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 건설한 수원을 신흥 도시로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생각을 기록한 것이다. '천일록'에는 농업을 비롯하여 실제 우리가 생활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여러 생각들이 기록되어 있다.
시대를 앞서 간 여인, 나혜석 (1896~1947)
나혜석은 1896년 4월 경기도 수원군에서 태어나 1947년에 돌아가셨다. 1921년 최초로 그림 전시회를 개최한 우리 나라 최초의 여자 서양화가이다. 또한 소설과 시를 발표하기도 한 문학가이기도 했다. 그리고 남녀가 서로 평등하다는 생각을 일찍부터 갖고, 이런 생각들을 여러 사람들에게 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 선각자이다.
김세환(金世煥) (교육자·독립운동가, 1889~1945)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일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자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이를 사전에 조직하고 준비한 47인 중의 한 분이 우리 수원 출신의 김세환 선생이다. 선생은 1889년 11월 18일 수원시 남수동 242번지에서 태어났다. 새로운 학문을 배우기 위해 한성외국어학교와 일본 중앙대학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수원으로 돌아와 삼일여학교(지금의 매향 여중·상업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9년 10월 감옥에서 나온 직후에는 곡물상회를 경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1925년 4월 17일 종로경찰서에서 경성지방 법원 검사에게 보낸 비밀 문건에 의하면 선생은 '조선사회운동자동맹 발기 준비위원회' 수원지역 준비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었는데, 위원회에는 당시 전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또한 1927년에는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이 힘을 합쳐 일제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결성한 '신간회' 수원지회에도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김향화(金香花) (기생 ․ 독립유공자, 1897~?)
본명이 순이(順伊)이며 행화(杏花)라는 이름으로도 불린 김향화는 경성에서 나고 자라서 수원기생이 된 후 수원예기조합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검무와 승무가 대표적인 기예이며, 양금을 연주할 수 있었다. 1919년 3월 29일, 수원예기조합 소속의 기생 일동이 검진을 받기 위해 자혜의원으로 가던 중 수원경찰서 앞에 이르러 김향화가 선두에 서서 수원기생 30여명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조국 독립의 기치를 높였다. 김향화는 일제 경찰에 체포돼 2개월 동안 감금과 고문 끝에 재판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2009년 대통령표창을 받고 독립유공자가 되었다.
이선경(李善卿) (독립유공자, 1902~1921)
이선경은 수원공립보통학교(현 신풍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서울의 숙명여학교에 입학, 1919년 3월 5일 서울 만세운동 시위에 참가했다가 구속돼 3월 20일 무죄로 풀려났다. 이 사건으로 숙명여학교에서 퇴학 조치를 받은 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하였고, 임순남과 최문순 등과 함께 비밀 결사조직인 혈복단(血復團)을 구국민단(求國民團)으로 개칭하고 활동하였다. 구국민단은 경술국치에 반대해 독립 국가를 조직할 것과 독립운동을 하다가 수감돼 있는 사람의 가족을 구조할 것 등의 목표를 세우고, 매주 금요일 삼일학교에서 회합을 가졌다. 1920년 8월 일제에 의해 구국민단의 활동이 발각되어 박선태․임순남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결국 1921년 4월 12일 재판 끝에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고 8개월의 옥고를 겪은 뒤 풀려났으나 9일 만인 4월 21일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다. 2012년 순국이 인정되어 건국포장 애국장을 받아 독립유공자가 되었다.
임면수(林勉洙)(독립유공자, 1874. 6. 13 ~ 1930. 11. 29)
신민회 독립운동기지 경기도 대표, 수원지역의 대표적인 근대교육가이자 독립운동가로 삼일학교 설립자이며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중국 만주로 건너가 유하현 삼원보 독립운동 기지의 경기도 대표로 활동하며 개척사업과 신흥무관학교 개설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통화현 합니하에 설립된 민족학교 양성중학교 교장으로 활동하며 독립군 양성에 기여하였다. 1910년대 중반에는 부민단의 결사대에 소속되어 활동하였으며, 3․1운동 이후 통화현에서 해룡현으로 근거지를 옮겨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체포 투옥되었다.
김장성(金長星)(독립유공자, 1913. 2. 7 ~ 1932. 3. 9)
수원소년동맹의 화신, 수원면 산루리에서 태어나 수원지역의 청년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 수원청년동맹 산하의 수원소년동맹의 맹원이었던 홍종근(18세)과 1930년 10월 12일이 화성학원의 운동회가 개최되어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을 예상하고 민족적 대중투쟁을 선도하는 격문을 살포하며 독립의 의지를 불태우다 체포되었다.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만기출옥을 20여일 앞두고 가출옥 된 뒤 1개월만에 순국하였다.
박선태(朴善泰)(독립유공자, 1901. ~ 1938.)
구국민단의 선봉, 수원면 산루리 출신으로 휘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9월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상해로 가려다가 삼일학교 교사 이종상을 만나 국내에서 항일투쟁을 펴기로 계획을 변경하고, 1920년 6월 20일 비밀결사 구국민단을 조직하여 단장으로서 활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혈복단으로 명칭을 바꾸고 독립운동 방침을 협의하는 등 활동하다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징역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홍종철(洪鐘哲)(이명 홍순철, 독립유공자, 1920. 3. 26 ~ 1989. 7. 22)
수원예술호연구락부 사건 주도, 수원면 인계리에서 태어나 1939년 10월 사회주의 청년 최용범, 차준철, 김길준, 맹승재, 강성문, 용헌식 등과 '수원예술호연구락부(水原藝術互硏俱樂部)'를 결성하였다. 이들 청년들은 국내 및 만주, 동경의 독립운동가와 연계하여 식민통치 체제의 비판, 민족차별과 조국독립, 공산주의 사회제도의 실현 등을 위해 활동하다 결국 체포되어 징역2년의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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