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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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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통구] 이의동
작성자 수원시청 작성일 2002/02/06 조회 1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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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동(二儀洞)

⊙ 갱들

훗골말(호꼼말) 서쪽 원천 저수지 위에 있는 들이다.

⊙ 공원 마을

이의동(하동) 제7통 지역에 있는 마을이다. 원래 마을 이름은‘개천동’,‘구
천동’등으로 불리었는데, 1993년 반상회를 통한 결의로‘공원 마을’로 바뀌게
되었다. 원천교 옆 마을 입구에 공원 마을이라 쓰여진 표지판이 있다.

이 마을은 원천 유원지 개발로 다른 곳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많이 살기 시작하
였다고 한다. 원래 용인군 수지면 하리에 속했으나, 수원시로 편입되게 되어 하
3통에서 4통으로 분통되었고, 이후 지금의 이의 7통으로 개편되었다.

⊙ 구석·구석이·구식이

하동 신대 저수지 주변에 있는 마을이다. 여수내 북쪽 구석에 있다고 해서‘구
석’,‘구석이’, ‘구식이’등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 금광수리·금광

신대 저수지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금을 광주리로 캘 정도로 금이 많이 났던
지역이라고 해서 ‘금광수리’라고 불린다는 유래가 전해온다. 또는‘금광수리’
라는 마을 이름은 옛날 어느 농부가 이 동네 밭에서 금을 캐는 꿈을 꾼 후, 실
제 그 밭에서 광주리 만한 금을 파냈던 데서 연유하는 이름이라고도 한다. 이와
는 달리 옛날 금을 캐던 광산이 있었기 때문에‘금광’이라고 부른다는 이야기
도 전해온다.

⊙ 긴잔등이

이의동과 우만동 3, 4단지, 그리고 연무동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 긴혜령곡 고개·진시낭굴 고개

이의동 243번지 일대에 있는 고개이다.‘혜령군의 묘가 있는 곳으로 넘어가는
긴 고개’라는 의미에서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진시낭굴 고개’라는 이름으로
도 불린다.

⊙ 길마재·안현(鞍峴)

신하리에서 수지읍 상현리 독바위로 가는 길에 있는 고개이다.‘길마재’란 이
름은 고개의 지형이 길마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즉, 고개의 모양이 짐
을 실으려고 소나 말의 등에 얹는 안장인 길마와 유사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보통 이 고개를‘길마재 고개’라 부르는데, 이는 동일한 의미를 가진 단어의
반복이라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즉,‘재’라는 단어 속에는‘넘어 다니도록
길이 나 있는 높은 산의 고개’라는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에,‘길마재 고개’라
는 표현은, 곧‘길마 고개 고개’라는 기이한 표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길마재’혹은‘길마 고개’라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이 고개는 ‘안현’이라
고도 불리는데, 이는 길마재를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이 고개 밑에는 길마재 마
을이 있다.

⊙ 길마재 마을·안현(鞍峴)

길마재 밑에 있는 마을이다. 길마재라는 고개 밑에 있다고 해서, 고개 이름을
그대로 마을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길마재의 한자어인‘안현’이라고도 불린
다. 이 마을은 줄다리기로 유명한데, 마을 이름을 따서‘길마재 줄다리기’로 불
리기도 하지만,‘장대홍묘전(張大興墓前) 줄다리기’,‘장장묘 줄다리기’,‘장
작묘 줄다리기’등으로도 불린다. 이는 줄다리기가‘장대홍묘(張大興墓)’,‘장
장묘’,‘장작묘’등이라 불리는 묘소 앞 공터에서 벌어지기 때문이다.

길마재 마을 사람들과 용인군 수지면 상현리 독바위 마을 사람들이 함께 참여
하는 이 줄다리기는, 오랫동안 중단되어 오다가 지난 1985년 마을 사람들의 자발
적인 노력에 의하여 재개되었고, 김우영(金禹泳)과 소병구(蘇柄九)에 의해 조사
발굴 및 고증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 줄다리기의 유래를 살펴보면 공동체의 위기
를 제의적 놀이로서 해결해 나가는 전형적인 사회 드라마(social drama)의 과정
을 보여주고 있어 학술적으로도 주목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그래서 1985년 마
을 사람들이 줄다리기를 재개하면서 마련한‘장대홍묘전 줄다리기 대장(臺帳)’
과 김우영·소병구의 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유래를 정리해 본다.

지금으로부터 약 2백 50여 년 전 수원시 이의동 길마재와 용인군 수지면 상현
리 독바위 일대 마을에는 각종 전염병이 돌아 목숨을 잃는 사람이 부지기수였
다. 마을 사람들은 날마다 공포 속에서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 별다른 도리가 없
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 마을의 장진종(張鎭宗)이라는 사람의 꿈에 아버지가 나타
났다. 장진종의 아버지는 조선 시대 문관으로 대흥군수, 영릉참봉, 영월부사 등
을 역임한 진천 장씨(鎭川張氏) 27세손 장이강(張以綱)이었는데, 이미 세상을 떠
나 부인과 함께 현재의 용인군 수지면 상현리 임야 600번지에 묻혔다. 그런데 꿈
에 죽은 아버지가 선유화를 쓴 구척 장신의 존엄한 신선으로 변해“내 묘지 아래
에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힘을 합하고 용기를 다하여 정월 상달 초야에 줄다리
기를 하라. 그러면 신(神)의 힘을 입어 온 동민이 무사할 뿐 아니라 연중 풍작으
로 만사 대통하리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진종은 아버지가 한 말을 이상히 여겨, 이른 아침부터 마을 사
람들에게 일일이 꿈이야기를 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서둘러 줄다리기를 하
자’고 했다. 인근 마을 사람들까지 총 동원이 되어 줄다리기를 하고 나니, 과
연 전염병은 사라지고 풍작으로 마을 사람들의 생활이 편안하게 되었다. 이에 마
을 사람들은 매년 줄다리기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 남경 모퉁이·남경

원천 유원지 매표소에서 방죽쪽으로 돌아가는 모퉁이이다.‘남경’이라고도 불
린다.

⊙ 느티나무

이의동 399번지에 있는 나무이다. 심온 선생 묘소 앞 마을에 있다. 350~500년
정도 된 나무로서 높이가 16m, 둘레는 3.2m이다.

⊙ 능안

수원시 폐기물 적환장 일대에 있는 마을이다. 이의동 4통 지역이다.‘능안’이
라는 이름은 심온 선생의 묘역을 능으로서 예우를 하여, 능이라 부른데서 연유
한 것이다. 즉,‘심온 선생 묘소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 능안 골짜기·능안골

이의동에 있는 골짜기이다.

⊙ 동역골·동역굴·동역(東域)

이의동 3통 지역에 있는 마을이다. 산의실 동남쪽에 있으며,‘동역골’,‘동
역’,‘동역굴’ 등으로불린다. 이 마을은 청송 심씨(靑松沈氏)의 집성촌(集姓
村)으로 산이 푸르고 물이 맑은 지역이었다고 한다. 1960년대에 조사한 수원의
동족 마을에서도 용인군 수지면 이의리에 청송 심씨 동족 마을이 형성되어 50세
대가 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이름 유래는 정확치 않으나, 지금부터 350년 전후까지는 산의곡 서당 위쪽
이라 하여 산의곡 궁내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것으로 표기되어 오다가, 약 250년
경에 동역 앞산을 동원(東園)이라 부른 것으로 보아 마을이 차츰 커지면서
250~200년 전 경부터‘동원’또는‘동역’으로 부른 것으로 추정되지만, 동역이
라 부른 정확한 연대는 알수 없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산의실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동역’이라 불리게 되었다
는 이야기와, 심온 선생의 묘 동쪽에 있는 마을인 데서 연유한다는 이야기도 전
한다.

⊙ 두릉리(杜陵里)·두렝이·의상(儀上)

쇠죽골과 성죽골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이의동 1통과 4통 일대에 해당하며,
쇠죽골과 성죽골 사이로 벌말까지 뻗어 내린 구릉의 끝자락에 있다.‘두릉리’라
는 이름은 마을 주변 구릉에서 봄부터 두견이가 울어대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
한다. 이 마을은‘두렝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산으로 둘러 싸여 있는 마
을’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또한‘의상’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산
의실 마을 위쪽(북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두렝이골

두렝이(두릉리) 뒤에 있는 골짜기이다.

⊙ 두산

심온 선생 묘소 뒤에 있는 산이다. 산의 초등학교 맞은편에 있다.‘조산’이라
고도 불리는 이 산은 심온 선생 묘소 좌우로 망부석의 역할을 한다고 한다.

⊙ 뒤릉·능뒤·두릉(杜陵)·두빙이

이의동 51번지~356번지 일대에 있는 마을이다. 산의 초등학교 앞 구멍 가게가
있는 일대이다. ‘뒤릉’은 능(심온 선생 묘소) 뒤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이라 한다.‘능뒤’라고도 불리는데, 이 역시 능 뒤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
름이다.

이 마을은 ‘두릉’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나라에 충정을 다 바치고도 죽음
을 당한 심온 선생의 억울함이 한이 되어 두견새가 밤마다 슬피 울었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그밖에 ‘두빙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 말무덤산

금광 북동쪽에 있는 높이 75.1m의 산이다. 신대 저수지 바로 밑에 있다. 신대
저수지 뚝방 밑 왼쪽으로 가면 쌍다리가 나오는데, 이 쌍다리 중 아래에 있는 다
리를 지나 원천 저수지로 넘어 가는 고개 길에 있다. 장군이었던 주인이 전쟁터
에 나가서 싸우다가 말 위에서 전사하자, 주인을 그대로 태우고 고향까지 찾아
온 말의 무덤이 이 산에 있다고 한다.

⊙ 방죽안·방축안·방축동(防築洞)

산의실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산의 초등학교 위쪽 지역이다. 이 마을은‘방
죽안’,‘방축안’,‘방축동’등으로도 불리는데, 마을 앞에 방죽이 있었던 연유
로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즉,‘방죽 안쪽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의
미이다. 이 방죽은 약 70년 전에 없어졌지만, 방죽안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전해
져 온다.

⊙ 버들치 고개

새말, 안골 마을 북쪽에 있는 고개이다. 이 고개는 수원시와 용인시의 경계선
이 된다. 옛날 이 고개 양쪽이 늪지대였으므로 버들이 무성하여 키나 고리를 만
드는 사람들이 이 곳에서 버들을 많이 채취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버들
치 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 벌말

이의동 1통, 4통 지역에 있는 두릉리의 중심 마을이다. 금광수리 남서쪽 벌판
에 있다.‘벌말’이라는 이름은 벌판 가운데 있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따라서‘벌판 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가 된다.

⊙ 시아리 서쪽산·빈더구니·분터골·빈터구니

이의동과 용인시 경계에 있는 산이다. 하리 서쪽에 있기 때문에,‘시아리 서쪽
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아마 심하리 서쪽에 있는‘독산’을 이렇게 부르는
듯하다. 이 산에는 ‘분터골’,‘빈터구니’라 불리는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골짜
기에 있는 바위가‘독바위’와 싸워서 금이 많이 갔기 때문에 분해서‘분터 바
위’가 되었고, 골짜기 이름은‘분터골’또는‘빈터구니’라 불리게 되었다는 이
야기가 전한다.

⊙ 산의실(山儀室)

이의동의 중심이 되는 마을이다.‘산의실’이라는 이름은 이 마을에 있는 심온
의 묘소와 연관된 이야기가 전한다. 심온은 조선 제4대 임금인 세종의 장인으
로, 영의정으로 있다가 1418년 12월 무고로 수원에서 사사(賜死)되었다. 그의 묘
는 용인현 산의곡에 있었는데, 심온의 외손자이자 세종의 맏아들인 문종과 둘째
아들 세조가 외조부 묘소를 참배한 후부터 마을 이름이 산의실로 불리게 되었다
고 한다.

이와는 달리 어원학적으로 보면, 보통‘실’은 골짜기[谷] 또는 마을을 의미
하는 것이므로,‘산의 실’이라는 이름은‘산 골짜기 마을’또는‘산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추정할 수 다.

⊙ 상산구니·상산군(商山君)

이의동에 있는 자연 마을로서, 벌말과 소적골의 중간에 있다.‘상사구니’또는
‘상산군’이라 불리는 이 마을 이름은 황효원(黃孝源 : 1414~1481년)과 관련된
유래가 전해진다. 황효원은 조선의 문신으로 자는 자영(子永), 시호는 양평(襄
平), 본관은 상주(尙州)로 세종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최초의 보신각 종을
만들었으며, 양관 대제학을 거쳐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오르며 좌익
및 좌리공신에 책록되어 상산군에 피봉되었다. 그가 이 곳에 묻히게 된 연유로
상산군 또는 상산구니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 상여천

팔달구 하동 관내 신대 저수지 위쪽 지역을 일컫는 지역 이름이다. 훗골말, 구
석이 등을 포괄하고 있다.

⊙ 시아리들

영동 고속도로 동수원 인터체인지 입구 일대에 있는 들이다. 심온 선생 묘소
가 내려다 보이는 곳 우측에 있는 들판으로, 땅이 비옥하여 농사가 유난히 잘되
는 곳이라고 한다.

⊙ 석수천 약수터

이의동 78-1번지에 있는 약수터이다. 예전부터 물맛이 좋고 깨끗하다고 소문
이 났었던 샘물로서, 1991년 12월 3일 약수터로 지정 설치되었다.

⊙ 섬말

산의 초등학교 인근, 43번 국도 주변에 있는 마을이다. 들판 가운데에 섬처럼
떠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 성죽골·승죽골

이의동 제4통 지역을 일컫는 마을 이름이다. 동수원 인터체인지 위쪽에 있다.
‘성죽(成竹)’이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조리를 만드는 대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것이다. 지금도 691번지 김수종 씨댁(金洙宗氏宅) 부근에는 많은 대나무가 자생
하고 있다. 이 마을은‘새말’이라고도 불리었는데, 이는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불리어 진 것이라 한다. 현재는 새말이라는 이름은 쓰이지 않고, 성죽
골 또는 승죽골로 불린다.

이 마을에는 조선의 정치가이자 외교가인 눌암 김찬(金瓚)의 묘소가 있다. 그
는 1543년-1599년 때의 인물로 자는 숙진(叔珍)이고 호는 눌암, 시호는 효헌, 본
관은 안동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대사헌으로, 1594년에는 접반사로 명나
라 지원군의 인도와 일본군과의 강화 회담에 크게 활약했으며, 예조 판서, 자의
금부사, 대사헌, 이조 판서, 지돈녕부사를 거쳐 우참찬을 역임했다. 임진왜란 수
습의 막후 절충을 성공시킨 외교가이자 경제 정책의 전문가요, 이름있는 문장가
이다.

⊙ 쇠죽골·소죽골·소마당·새말

이의동 북쪽에 있는 자연마을이다.‘소죽골’,‘소마당’,‘새말’등으로도 불
린다. 마을 이름의 유래는‘소’를 실마리로 하지만 서로 다른 두 가지가 전한
다. 첫 번째는 소[牛]와 연관된 이야기이다. 산칡넝굴 등 소먹이가 많은 곳으
로, 광주군, 낙생면, 운중동, 태장 등에서 수원으로 들어오다가 이 마을에서 쉬
면서 소의 먹이를 주고 물을 먹였기 때문에 소죽골, 쇠죽골, 소마당 등으로 불리
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소’를 가축 소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작다라
는 의미를 가진‘소(小)’로 보아서, 죽골보다 작은 골짜기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소죽골’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추정을 하기도 한다.

⊙ 수청 거리

방죽안 앞에 있는 들이다.

⊙ 신대(新垈)

윗여수내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신대’라는 이름은, 새로된 마을이라 해서
‘새터’라 불리는 이름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 신하리

지금의 매탄, 곡반정, 망포, 태안, 병점, 송산, 안녕리 등에 걸쳐 있는 수원
들판에 물을 대기 위하여 여수내에다 저수지를 막게 되자, 한씨 집성촌이 사방으
로 흩어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능 아래에 있다하여 행정리를 하리(下里)로 했다
가, 법정, 상여천, 하여천, 금광으로 나누어졌고, 이때 생겨난 마을이 신하리 5
통 2반과 3반 등이다.

⊙ 심온 선생 묘(沈溫先生墓)·심사당

이의동 13-10번지에 있는 조선 초기 문신(文臣) 심온 선생의 묘이다. 동수원
인터체인지 진입로 부근에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5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반
적으로‘심온 선생 묘’라고 부르지만,‘심사당’이라 부르기도 한다.

심온(1375~1418) 선생의 자(字)는 중옥(仲玉)이며, 본관(本貫)은 청송(靑松)으
로 세종의 장인(丈人) 곧, 부원군(府院君)이다. 고려 말에 11세의 나이로 진사
(進士)가 되었고, 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며, 1392년(태조 원년) 조선 개국 후
에 병조·공조의랑(兵曹·工曹議郞)을 시작으로 하여, 1418년(세종 원년)에 영의
정 지위에까지 이르렀다. 그 후에 사신(使臣)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귀국할 때 마
침 옥사(獄事)가 일어나 의주(義州)에서 체포되어 수원에 와서 사사(賜死)되었
다. 문종 때에 이르러 복관(復官)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안효(安孝)이다. 심온
선생의 묘역은 2단으로 되어 있다. 1단에는 백 대리석에 안평대군(安平大君)의
글씨로 된 묘비와 상석(上席)이 갖추어져 있고, 2단에는 정방형 운족석등과 좌
우에 문인석(文人石) 한 쌍이 있다. 높이는 1.42m, 폭 46.5m, 두께 7.5m로 되어
있다.

심온 선생 묘역에서 약 100m 떨어진 좌측 마을 입구에는, 조선 시대 종이품(從
二品) 이상의 벼슬을 했던 사람의 무덤이 있는 근처 길가에 세우는 비석인 신도
비(神道碑)가 있다. 그동안 산의실을 지나던 사람들은 이 신도비만 보고도 부원
군의 묘가 있는 동네라는 것을 알아보게 되어 일종의 마을 이정표 구실도 해왔다
고 한다.

⊙ 안골

산의실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동수원 인터체인지 위쪽 지역이다. 벌말 동쪽
산밑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마을이라 해서‘안골’이라 불린다고 한다.

⊙ 양지작말

원천 저수지 서쪽아래 있는 마을이다. 일제 강점기에 양조장이 있었기 때문에
‘양조장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로‘양지작말’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 유래
로 보아,‘양조장말’또는 ‘양조장 마을’이라 부르는 것이 올바를 듯 싶다.

⊙ 여수내[麗水川]·여천(呂川)

하동 제5통 일대의 마을이다.‘여수내’또는‘여수천(麗水川)’라 칭했고 이름
은 마을 주변의 산과 내가 수려(秀麗)하여 지어진 것이라 전한다.‘여천(呂川)’
이라고도 불린다.성종의 외사촌이며 사헌부 감찰 및 금산, 아산, 양주, 평해 4군
의 군수를 역임한 청주 한씨 평해공의 묘소를 505여 년 전 하동 산 12번지에 모
시고, 약 150여 년 전부터 그 후손들이 이 곳에 모여 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약 60여 년 전에 둑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고‘여천 저수지’라 칭했고, 저수
지가 만들어진 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상류와 하류로 각기 흩어져서 살게되
었다. 그래서 여수내 마을은, 상류 마을인‘웃여수내’와 하류 마을인‘아랫 여
수내’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이후 10여 년 전 유원지 개발로 아랫여수내 마을
이 없어지게 되고, 현재는 상류 마을인 웃여수내 마을만 남아있다.

⊙ 왯벌

산의 초등학교 앞에 있는 들판이다. 토양이 찰흙으로 되어있어 비가 오지 않
을 경우 땅이 굳어 농사짓기가 아주 힘이 들어 왜놈들처럼 나쁘다고하여‘왯벌’
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에 따른다면,‘왜놈들처럼 나쁜 땅’이라는 의
미가 된다.

⊙ 윗여수내·상여천(上呂川)

여수내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상여천(上呂川)’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여
천 상류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의하(儀下)

산의실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다. 산의실 마을을 기준으로 하여 위쪽에 있는 마
을을 의상이라 하고, 아래쪽에 있는 마을을‘의하’라 부른다고 한다.

⊙ 이의동 공동 묘지

경기대 정문에서 경기도 경찰청으로 가는 도로 주변에 있는 공동 묘지이다. 수
원시의 매장지였으나, 지금은 인근 지역의 개발로 인하여 묘지들이 거의 이장되
었다.

⊙ 작은 안골

혜령골 옆(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인근에 큰 안골이 있다.

⊙ 작은 안골 고개·안골 고개

혜령골 남쪽에 있는 작은 안골로 가는 고개이다. 작은 안골 북쪽에 있다.‘안
골 고개’라고도 부른다.

⊙ 작은 젓굴

이의동에 있는 골짜기이다.

⊙ 전나무배기

이의동에 있는 자연 마을이다. 현 경기대 입구 지역을 말한다. 전나무가 많이
있었던 지역이라 이러한 이름으로 불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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