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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저수지] 만석거
작성자 수원시청 작성일 2002/02/06 조회 1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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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거(萬石渠)·조기정 방죽·북지(北池)

장안구 송죽동에 있는 저수량 37.7만톤, 유역 면적 416ha, 만수 면적 24.7ha
의 저수지이다. 이 저수지는‘만석거’,‘북지’,‘조기정 방죽’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데, 극심한 가뭄이 전국을 휩쓸고 있을 때인
1794년(정조 18)에 축조를 결정하고, 다음 해인 1795년(정조 19) 1월에 공사
를 시작해서 같은 해 5월 18일에 공사를 마쳤다.

『정조실록』에는 정조가 만석거 축조를 지시하면서,“근래에 재앙이 잇따른 것
은 대체로 수리를 강구하지 않은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호남의 벽골제는 만일
더 깊게 파내기만 하면 이같은 한재(旱災)는 염려할 것이 못된다. …(중략)… 내
가 항상 이 일을 먼저 화성에서부터 시험해 보고자 하나, 오래도록 폐단이 없을
것이라고 보장하기 어렵다.”고 나와 있다. 이에서 보듯 정조는 가뭄을 극복하
기 위한 저수지 축조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시범적으로 화성에 만석거를 조성하라
고 명하면서도 백성들에게 끼칠 피해를 걱정하고 있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부편Ⅰ 정거(亭渠)에는, “장안문을 나와 북쪽으
로 5리쯤인 지하동구(芝荷洞口) 진목정(眞木亭) 아래에 개울을 뚝 잘라 방죽을
쌓고 만석거라 이름하였다.”라 나와 있으며, 다음과 같이 축조 상황과 규모를
말하고 있다.

갑인년(1794) 겨울 정역 윤음(停役綸音) 때문에 우선 북성밖에 버려 두었던 땅
을 개간하였다. 이듬해 봄에 또 광교 상류 근처에 보를 파고 뜰을 내어 신전(新
田)을 더 넓혔다. 그러나 서쪽으로 3리 떨어진 고등말[高等村] 북쪽 벌인 소금기
가 있는 땅은 멀리 바라보면 모두가 황량하다 할만하였다. 마침내 진목정 아래에
서 개울을 뚝 잘라 방죽을 쌓고 물을 채우고 물문[閘]을 설치하여 관개의 이로움
을 일으키니 이것이 만석들이다. 둘레가 1,022보요, 얕은 곳이 7척, 깊은 곳이
11척, 둑길이가 725척, 방죽의 밑변 두께가 52척이고, 방죽 윗면 너비가 17척이
었고, 방죽은 남쪽 토안(土岸)에서 시작해서 북쪽 낭떠러지[石岸]에서 끝났다.
그래서 그 낭떠러지 돌로는 수구(水口)를 만들어 물을 끌어내리는 수로로 만들었
고, 나무 다리를 놓아 여의교(如意橋)라 하였다. 그리고 다리 나비와 방죽 등어
리와를 그대로 연로(輦路)로 만들었다. 또 남쪽 머리께의 방죽이 시작되는 곳에
한 개의 물구멍을 깍은 나무를 설치했는데, 마치 우물난간[汀蘭]의 틀과 같은 것
으로 가로 세로로 엇쌓아서 네모꼴 구멍을 꿰뚫어 관개 수로가 되게 한 것이다.
안쪽에는 물문을 설치하고 가로로 14층의 격판(隔板)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널
판을 합친 높이는 5척 5촌이나 된다. 보통 때는 널판을 빗장치듯 하고 흙으로 물
문을 꼭 닫되 안쪽에서 바라보아서는 구멍이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관개할 때에
는 널판을 열어 물을 내보내되 그 많고 적음을 알맞게 한다. 그 아래로 몽리되
는 논은 모두가 고등말 북벌이다. 장안문 밖으로부터 신간한 곳을 총칭해서 대유
평(大有坪)이라 한다.

『수원부읍지』에도,“북으로 5리 일용면에 있다. 정조 을묘년에 쌓았다. 길이
가 875척, 넓이 850척, 높이 12척 5촌, 두께 10척 5촌, 깊이 8척 7촌, 수문 2
곳, 몽리답(蒙利畓) 66섬지기”라고 나와 있어, 당시의 규모를 알 수 있다.

만석거를 축조하고 얻어진 효과는 정조 21년과 22년에 연이어 발생한 재해에
서 나타났는데, 당시 수원 지방은 이를 통해 극심한 가뭄을 이겨냈던 것이다.
1798년 만석거 축조로 가뭄을 이겨낸 정조는 그의 저서 『홍재전서(弘齋全書)』
에서,“지금 화성의 만석거를 보면 제언이 축조되기 전까지는 황폐한 전답이었으
므로 쑥만 울창하게 자랐던 땅이 제언이 축조된 이후부터는 물줄기가 호탕하여
버려진 땅이 옥토로 변하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화성성역의궤』에 실린 「영화정도(迎華亭圖)」를 보면, 만석거 물 위에 떠있
는 배와 주변의 버드나무, 소나무의 풍경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영화정이 보이며,
‘만석거(萬石渠)’, ‘여의교(如意橋)’라 새긴 표석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수원군읍지』에서, “여의교에서 100보쯤 길 동쪽에 표석이 있어 만석거라 새
겨졌고 그 동편은 영화정이다.”라고 나와 있는 것과 일치한다.

만석거는‘교구정 방죽’또는‘조기정 방죽’이라고도 불린다. 이는 화성유수
가 교체될 때 새로 오는 관리가 가진 거북돌 반쪽과 떠나는 관리의 거북돌 반쪽
을 맞대어 보고 임무 교대를 하는 교구정(交龜亭)이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
진 것이다.‘조기정 방죽’이라는 이름은‘교구정 방죽’이라 불리던 것이 와전
되어 변한 것이다.

만석거는‘북지’라고도 불리었는데, 이는 일제 강점기에 만석거가 북쪽에 있
다하여 붙여진 것이다. 그런데 이 북지는 북은구 안쪽에 있었던 북지와는 다른
것임에 주의해야 한다.

옛부터 이 저수지는 농업 용수로 긴요하게 사용되었지만, 주변 경관 또한 뛰어
나서 누렇게 익은 벼가 황금 물결을 이룬 만석거 주변의 풍경을‘석거황운(石渠
黃雲)’이라 하여 수원 추팔경 중에 하나로 꼽았다.

정조시대 최초의 제언인 만석거의 가치는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2017년 10월 국제관개배수위원회(ICID)의 세계관개시설물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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